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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남에겐 꽃뱀, 나에겐 애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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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1987년 1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경찰 물고문으로 서울대 박종철군이 숨졌다. 경찰은 “수사관이 탁자를 ‘탁’ 치니 박군이 ‘억’ 하고 숨졌다”고 발표했다. 정부수립 이래 공직자의 사건 해명 중에서 ‘탁 치니 억 하고’는 불멸의 기록으로 꼽힌다. 이 해명은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강경 보수세력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그해 6월 시민항쟁에서 국민이 정말 ‘탁’ 치니 정권은 ‘억’ 하고 항복했다.

 ‘탁과 억’이 보수의 추악한 기억이라면 곽노현 교육감의 ‘2억원 선의’는 진보의 충격적인 위선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달 28일 그는 장문의 대국민 해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후보 단일화 대가와 관련된 어떤 얘기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며칠 후 거짓으로 드러났다. 선거 회계책임자가 당시 사퇴한 후보에게 “도와주겠다”는 이면합의를 해주었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선거 수개월 후 사퇴자가 약속이행을 압박하자 교육감에게 사실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단일화 합의내용을 당시 곽노현 후보자가 몰랐다는 건 믿기 어렵다. 하지만 측근 주장대로 교육감이 나중에 알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국민에게 거짓 해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나중에 보고받았더라도 곽 교육감은 회계책임자를 질타하고 사실을 국민에게 공개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돈을 주고는 선의(善意)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선행이라면 왜 뇌물처럼 은밀히 주었나.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라면 공개적으로 ‘박명기 돕기’ 운동을 벌였어야 하지 않나. 곽노현은 해명서에서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된 표적수사”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시민이 선출한 공직자로 치켜세우면서 시민이 위임한 공직자 검찰은 매도한 것이다.

 ‘탁과 억’은 경찰관 몇 사람이 아니라 보수 정권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나중에 1차·2차 고문은폐가 드러나면서 파장은 더 커졌다. 곽노현 사건도 개인을 넘어 진보진영 전체의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진보파 시민그룹은 지난해 곽노현 후보의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며칠 전 기자회견에서 교육감의 변명을 옹호하고 검찰과 언론을 공격했다. 그들은 “곽 교육감은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2008년 10월 보수파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이 선거자금 의혹에 휩싸였다. 급식업체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사설학원 원장들에게서 7억원을 빌린 혐의였다. 진보파 시민·노동·교육운동 단체는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검찰수사와 교육감 사퇴를 촉구했다. 그때 공정택 공격을 이끌었던 시민그룹 중 핵심인사들이 2년 후 곽노현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이 지금 곽노현을 감싸고 있다.

 강경파 진보그룹은 2008년 여름 ‘학생들의 건강’을 들어 광우병 촛불로 이명박 정권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학생들 사이에선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돌았다. 미신은 학생들의 증오를 키웠다. 일부 초등학생은 시청 앞 광장 방명록에 대통령을 가리켜 “XX”라는 욕을 썼다. 엄마들은 옆에서 웃었다. 강경 진보파가 1억분의 1도 안 되는 광우병 위험을 부추기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광우병에 비하면 곽노현 사건은 학생들의 정신건강에 수만 배나 위험한 실제상황이다. 그런데 환영(幻影)에 흥분했던 과격파 진보는 실물(實物)엔 입을 닫고 있다.

 이 나라의 일부 잘못된 진보세력은 ‘자신은 로맨스, 타인은 스캔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정택의 손을 거쳐간 돈은 뇌물이요, 곽노현의 것은 선의란다. 공정택의 돈은 꽃뱀이요, 곽노현의 것은 애인이란다. 곽 교육감은 해명서에서 법에서는 올바름, 교육에서는 정직을 배웠다고 했다. ‘법과 정직의 모범생’이 오늘 검찰에 출두한다. 공정택이 꽃뱀에 물려 감옥으로 갔던 길이다. 그 길을 곽노현은 선의라는 애인을 데리고 간다. 그 아름다운 동행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