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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교육의 목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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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유배지에서 가장 고민한 것은 두 아들의 교육 문제였다. 두 아들은 과거 응시 자체가 막히자 학문을 등한시했다. 그래서 다산은 순조 3년(1803) 정월 초하루 ‘두 아들에게 부친다(寄兩兒)’라는 편지 글에서 ‘폐족(廢族)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하는 것만 기피될 뿐 성인(聖人)이나 문장가(文章家), 세상 이치에 통달한 선비가 되는 길은 기피되지 않는다’면서 학문에 힘쓰라고 권하고 있다. 학문의 목적이 출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 사건으로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 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도 마찬가지였다. 이광사가 체포되자 부인마저 자살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장남 이영익(李令翊)은 유배지의 부친에게 사방 벽에다 ‘참을 인(忍)’자 등을 써놓고 수행과 학문에 열중한다고 편지했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인’자로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자식의 처절한 몸짓에 대해 명필(名筆)로 유명한 이광사는 영조 34년(1758) 2월 ‘경효(慶孝·후에 영익으로 개명)에게 부치니 보아라(寄示慶兒)’라는 글에서 공부에 열중하는 것은 칭찬하면서도 “그 가운데 ‘인’자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타일렀다. 이광사는 “장공예(張公藝)의 ‘인’자 백 자는 친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가 아니다. ‘인’이라는 것은 억지로 물을 막는 것과 같아 마침내 터지고 만다”고 설명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구대(九代)가 한 집안에 동거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장공예 열전’이 실려 있다. 당 고종이 태산(泰山) 가는 길에 직접 방문해 ‘구대 동거’의 비결을 물어보니 ‘참을 인’ 백여 자를 썼다는 것이다. 극도의 인내로 견딘다는 아들의 편지에 이광사는 처한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마음 공부’를 하라고 충고한 것이었다. 교육이나 학문의 목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통찰이다. 현재 한국 교육에서는 이 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다.

 서울시교육감이 후보 매수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도 ‘당선’이란 결과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교육감 선거까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승리 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다. 『소학(小學)』 ‘가언(嘉言)’은 안자(顔子)와 맹자(孟子)처럼 성인에 버금가는 사람들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최소한 현인(賢人)은 될 수 있으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무엇을 지향하는지 반문해야 할 때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