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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디자이너 공예 프로젝트 ① 석장 이재순+디자이너 마영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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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마영범 디자이너와 이재순 석장의 작품인 화강암으로 만든 ‘천록’ 석상. 천록은 잡귀를 물리치는 성스러운 동물로 왕궁에 놓였다. 작은 크기지만 선의 역동성을 살렸고 눈에 크리스털을 박아 현대적 감성을 더했다. 석상 크기: 길이 330mm, 너비 230mm, 높이 250mm


장인·디자이너 공동 프로젝트가 처음 내놓는 작품은 석상이다. 처음 제안을 받을 때부터 마영범(54) 디자이너는 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네 석장들은 화강암을 주로 다룬다. 우리 땅덩어리 자체가 대개 화강암 지대다. 기발한 착상이 시대적 명품을 낳는다지만, 투박해 보이기만 하는 화강암 석상을 실내에 두는 공예문화상품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무모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지문이 찍힐 것처럼 부드러운 석회석이나 대리석 조각이라면 모를까. 마 디자이너의 발상은 6월 이재순(56) 석장의 손을 만나면서 형태가 잡히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아담한 석상 하나를 눈앞에 만들어냈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투박한 화강암이 친근한 생활 속 조형물로

이번 작품의 모델이 된 경복궁 영제교 천록의 3차원 이미지.

엄밀히 말하면 마 디자이너의 감성이 꽂힌 지점은 돌이 아니라 이 석장의 작품이다. 마 디자이너는 지난해 7월 서울 인사동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열린 중요무형문화재들의 작품 전시회에 들렀다. 장인들이 저마다의 솜씨를 발휘한 여러 작품 중 그가 가장 놀란 것은 이재순 석장이 만든 자그마한 동자상이었다. 그는 “왕궁의 조형물이나 절간의 탑 등 돌로 만든 건 덩치가 크다고만 막연히 생각했다”며 “돌 조형물을 실내에도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동자상은 겉이 우툴두툴해 코 앞에서 들여다보면 형체를 쉬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발자국씩 뒤로 내딛자 희미했던 선이 조금씩 뚜렷해지면서 거친 질감을 입은 형체가 오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석회석·대리석으로 사실적인 조각을 해온 서양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화강암으로 만든 조형물의 특징이다. 마 디자이너는 “언젠가는 함께 꼭 작업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마영범 디자이너는 이재순 석장의 작업실을 찾아 화강암의 질감을 살릴 수 있는 작품을 논의했다

그러던 차에 진흥원에서 “장인·디자이너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 디자이너는 두말할 것 없이 이재순 석장과 작업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올 6월 둘은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막상 돌을 주제로 선정했지만, 딱히 ‘작품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돌솥·돌침대를 만들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언뜻 마 디자이너의 머리를 스친 것이 우리네 석조형물이다. 공예품은 생활에 쓰여야만 한다는 전제를 뒤엎는 역발상을 하기로 했다. 한국의 느낌을 제대로 전해주는 조형물이라면 실용적인 쓰임새가 없어도 충분히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논의 끝에 작품으로 만들 석조형물 후보를 두 가지로 좁혔다. 천록과 잡상. 우리네 정체성을 보여주는 동물로 둘 모두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의미를 담고 있고, 왕궁에 설치되는 신성한 동물이라 동양의 신비감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둘 가운데 천록으로 최종 결정했다. 잡상은 기와를 만드는 와장이 주로 제작하는 것이라 석장에게는 천록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고전적 소재 + 위트 넘치는 현대적 감각

이재순 석장이 가느다란 정으로 거친 화강암에 조심스럽게 천록의 모습을 입히고 있다. 그는 “‘땅’하고 때리고 싶은 유혹을 작은 석상이 깨질까 참느라 혼났다”고 말했다.



천록은 상상 속의 동물로 삼지창 모양의 뿔이 나 있으며 온 몸이 비늘로 덮여 있는 형태다. 국내에는 경복궁 금천에 놓인 영제교 옆 벽면 위에 네 마리가 있다. 담 위에 넙죽 엎드려 물을 건너는 잡귀에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다. 그중 영제교 서북쪽에 놓여 있는 녀석은 익살스럽게도 혀를 낼름 내밀고 있다. 조선 석공의 재치가 담뿍 묻은 이 녀석이 모델로 낙점됐다.

이 동물의 두 눈에 스와로브스키 엘리먼츠에서 제공받은 고급 크리스털을 박아넣기로 했다. 마 디자이너는 “화룡점정으로 품격을 더해주고 고전적인 형태의 동물에 현대적인 감수성을 더해 외국인도 받아들이는 데 위화감이 없도록 할 의도”라고 말했다.

뭉툭한 화강암 돌덩이에 그려진 밑그림.

문제는 크기였다. 실내용으로 제작해야 하니 1m가 넘는 경복궁의 천록보다 훨씬 덩치가 작아야 했다. 마 디자이너는 “실내에 들이려면 길이를 30~40㎝로 줄이고 여성도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게여야 한다”고 했다. 이재순 석장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 석장은 “화강암은 입자가 거친 돌이라 크기가 작을수록 조각하기 더 힘들다”고 말했다.

6월 말부터 제작에 돌입했다. 이 석장은 화강암 중 ‘중매’를 골랐다. 중매는 중간 크기의 입자로 구성된 화강암으로 특유의 질감이 드러나 운치가 있다. 소매(입자가 작은 것)를 택하면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지지만 일본색이 짙어지고, 화강암 특유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덜 살아난다.

이 석장은 주로 쓰던 가래떡 굵기의 큰 정을 놓고 새끼손가락 굵기의 작은 정을 들고 조금씩 화강암을 다듬어 나갔다. 한데 작업을 할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여전히 문제는 크기였다. 커다란 석상은 디테일을 살려도 부담이 없지만, 작은 녀석에게 지나친 치장은 조잡할 따름이었다. 마 디자이너는 “화려한 비늘을 과감히 포기하지만 역동성은 그대로 두자. 성수(聖獸) 특유의 위압감을 내려놓고 위트 있는 모습을 표현하자”고 제안했다. 이 석장은 이야기를 거는 듯한 사근사근함과 자그마한 크기에 알맞은 귀여움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록은 앙증맞았다. 가까이서는 투박한 질감만이 느껴졌지만 뒤로 물러나면서 보자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자연스러운 형태가 살아났다. 이동을 편리하게 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기 위해 옻칠을 한 더글라스 소나무 조각 위에 놓기로 했다. 천록의 모양도 잡혔고, 판매할 때의 형태도 정했지만, 최종 마무리는 남았다. 마 디자이너는 “천록의 아랫부분부터 눈까지 작은 구멍을 뚫은 뒤 그 구멍을 통해 크리스털을 눈에 얹어 작품의 가치를 더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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