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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인연 맺은 첫 유대인, 60년대 외자 도입의 막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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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28면

아이젠버그는 음지에서 활동했던 탓인지 남아 있는 사진이 별로 없다. 큰 사진은 아이젠버그의 원래 사진 (아래)을 그림으로 처리한 것이다. 일러스트=최종윤

한국인과 유대인은 역사적·종교적·문화적 인연이 전혀 없다. 한반도 내에서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지낸 우리가 유대인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오랜 세월 세계를 떠돌며 유랑하던 유대인도 국제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 한국인과 유대인이 접촉한 역사는 일천하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냉전시대 동과 서를 잇던 사울 아이젠버그

1950년대 초 한국전에 참전한 20여 명의 유대계 미군들은 병영 내에 간이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예배소)를 차렸다. 차임 포톡이란 군종 랍비가 유대교 예배를 집전했다고 한다. 포톡은 전후 뉴욕에 돌아가 철학가와 문인으로 명성을 날리다 2002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병영 내 일인 만큼 한국인과 유대인이 직접 접촉한 사례는 아니었다. 한국전이 끝날 무렵에 가서야 한국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유대인이 나타났다. 사울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다.

아이젠버그는 1921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오늘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양국에 걸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이자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던 갈리치아 출신이다. 39년이 되자 그의 가족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예감하고 독일을 떠나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중국 상하이로 갔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였던 상하이엔 유럽 각국에서 피란 온 약 3만 명의 유대인들이 게토를 이루고 살았다. 같은 시기 만주 하르빈에도 나치를 피해 건너온 유럽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나치 피해 상하이로 도쿄서 사업 시작
아이젠버그는 상하이에서 시온주의 청년 행동대 ‘베타르’에 가입했다. 베타르와 ‘이르군(Irgun; 대영 항쟁 비밀군)’ 등 두 개의 유대인 비밀 무장 행동대는 훗날 이스라엘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 된다. 45년엔 미군정 치하에 있던 일본으로 건너가 미군을 상대로 생활 용품과 고철을 팔았다. 오스트리아와 일본의 혼혈 여성과 결혼한 아이젠버그는 이 시기부터 도쿄에 거점을 두고 한국과 태국 등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는 한국전 정전 무렵 한국에 진출했다. 자유당 정권 시절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오퍼상 사무실을 내고 목재·철강·섬유 등 수입품 브로커 사업을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여권을 소지했던 그의 한국 진출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오스트리아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젠버그는 61년부터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5·16 직후 미국의 무상 원조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아이젠버그는 61년 가을 한국의 군사정부를 위해 서독 차관의 도입을 중개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그는 많은 커미션을 챙겼다. 그럼에도 그가 주선한 차관은 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재원의 상당 부분을 충당해주었다. 이후부터 아이젠버그는 한국 정계의 실력자 여러 명과 결탁해 국가 주요 사업에 간여했다. 그는 전화 교환기 설비, 화력 발전소, 시멘트 공장, 원자로 도입 등 굵직한 사업에 필요한 외자 도입을 주선했다. 대부분 턴키 방식이었다. 73년 우리 원전 3 호기인 가압 중수형 캐나다 캔두 원자로의 도입 땐 유럽 30개 은행의 차관단 컨소시엄을 구성해 자금을 공급하는 비상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한국 유력 정치인 수명에게 뇌물을 주는 등의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항상 철저한 신용과 보안 유지로 거물 국제 브로커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70년대 말 베트남에 억류된 한국 공관원 석방을 위한 막바지 교섭에도 참여해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젠버그는 냉전시대 공산권 사정에 유독 밝았던 인물로 미국 CIA와 공산권 정보기관 간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서방 기업이 진출하지 못했던 공산권 국가와 서방 세계 간 중개 역할을 하면서 상당히 재미를 보았다. 그는 78년부터 시작된 중국과 이스라엘 간 관계 정상화 작업의 배후 인물이기도 했다. 양국은 92년 공식 국교를 수립했다. 당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수교기념 공식 만찬석상에서 아이젠버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발언을 했다. 그간 음지에만 있던 신비한 인물이 처음 양지로 나왔다.

중-이스라엘 수교 작업 모사드 요원설
49년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한 아이젠버그는 68년 텔아비브에 본사를 둔 이스라엘코퍼레이션(IC)이란 다국적 기업을 설립했다. 주요 업종은 무기·에너지·해운업이다. 그는 지금도 세계 각국 경호기관과 특공대가 많이 사용하는 이스라엘제 기관총 우지(Uzi)를 90여 개국에 보급했다. 또한 이스라엘 군산 복합체와 정보기관 모사드의 협조를 얻어 캄보디아와 중국에도 이스라엘제 무기를 밀매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땐 다국적기업을 통해 양측에 무기를 팔았다. 그는 이런 식의 고위험·고수익 사업 위주로 커다란 부를 쌓았다.

아이젠버그는 97년 중국 베이징 체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100억 달러(약 10조8000억원)대의 재산과 함께 보잉 727 자가용 비행기와 세계 7개 도시에 저택을 소유한 대부호였다.

아이젠버그가 오랫동안 모사드 요원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평생 미스터리로 가득 찬 삶을 산 그가 모사드 요원이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정보 세계 표현인 ‘명예로운 협조자(Honorable Correspondent)’로 모사드와 각별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엔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그는 항상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배후에서 은밀하게 활동했다. 한국에는 아이젠버그가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유대인이었으며 우리가 힘들었던 시기에 한국을 도왔다. 물론 적지 않은 사업 이득을 취하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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