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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6번째 대멸종기 ‘인류세’ 진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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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구도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발사된 지구 중력장(重力場) 측정용 위성자료를 분석해 확인한 결과다. 극지방의 얼음 녹은 물이 적도대(赤道帶)로 몰리면서 ‘복부비만(腹部肥滿)’이 됐다. 이는 지난달 29일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연구팀이 제기한 주장이다.

반론도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연구팀은 17일 지구 모양이 바뀌지만 오차범위 내라고 반박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이 같은 논란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 기후뿐 아니라 지구 모양까지 바뀌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됐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이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 연대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이유다. 하긴 지구 나이 46억 살, 배가 나올 때도 됐다.


올여름 한반도는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았다. 지루한 장마와 갑작스러운 집중호우, 태풍까지 겹치면서 강우일수와 강우량 등 비와 관련된 기록이 잇따라 깨졌다. 일상화된 기상이변은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기후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31년 동안 10억 달러(약 1조800억원) 이상의 재산 피해를 낸 자연재해가 99건이나 발생했다. 올 들어서만 폭설·토네이도·가뭄·홍수가 이미 9차례 발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8일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기상이변이 일상화되고 있다”며 “올해 상반기 전 세계가 자연재해로 입은 경제적 손실이 2650억 달러에 달한다”고 말했다. 뮌헨 재보험회사가 분석한 자료를 인용한 이 수치는 종전 최고기록 2200억 달러(2005년 상반기)보다 20% 이상 늘어난 것이다.

크뤼천

 ‘인류세’라는 용어가 나오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2001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처음 제안한 이 용어는 인류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지구촌 기후를 변화시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를 대거 사용하면서 이산화탄소(CO2) 같은 온실가스를 내뿜었고 이것이 지구온난화·기후변화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안진호 교수는 “지난 1만1700년 동안 대기 중 CO2 농도가 180~200ppm 범위에서 변하다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8000년 전부터 260ppm으로 상승했고, 1800년 280ppm이던 CO2 농도는 현재 390ppm으로 가파르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인류 멸종’의 경고음?=지구온난화 외에도 파괴적인 새 지질시대를 여는 요인은 많다. 우선 질소(N2)다. 오늘날 인류는 대기의 80%를 차지하는 질소를 원료로 비료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남는 질소가 호수와 바다로 들어간다. 자연 상태에서 유입되던 양의 2.5배나 된다. 호수와 바다가 부영양화(富營養化)되면 식물플랑크톤이 과도하게 번식하고, 이들이 썩으면 바다도 산소가 사라져 ‘죽음의 물’로 변한다.

 방사능 물질도 있다.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이나 여러 차례에 걸친 핵 실험, 구소련의 체르노빌과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지구촌 곳곳에 죽음의 물질이 퍼져 있다. 수십만 년 사라지지 않을 인류의 ‘오염 흔적’이다. 도시의 콘크리트 잔해와 플라스틱 쓰레기도 ‘인류세 지층’을 대표하는 화석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크게 보면 지구는 지금 인류가 숲을 잘라 내고 습지를 파괴하면서 여섯 번째 대멸종(mass extinction)을 겪고 있다. 향후 500년 동안 지구 생물종의 20~50%가 멸종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새 지질시대는 인간이,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측면이 강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 지질시대는 이처럼 파괴적인 속성으로 다시 인간에게 앙갚음한다.

 ◆인류세 시점 놓고 논란=인류세라는 용어를 도입하는 문제는 올 들어 전문가들 사이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5월 런던에서 열린 영국지질학회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미국지질학회는 10월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정기 학술대회의 주제를 아예 ‘시생대(始生代)에서 인류세까지’로 정했다. 시생대는 시생이언(eon)이라고 하며 지구가 탄생한 이후 첫 지질연대를 말한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인류세로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농경이 시작된 먼 과거부터라는 주장도 있고, 산업혁명이 시작된 200년 전부터 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안 교수는 “자연적인 과정보다 지구 시스템이 인류 활동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류가 깨닫기 시작했다는 게 인류세라는 용어가 갖는 진정한 의미”라고 강조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 신생대 마지막 시기인 홀로세를 뒤잇는다. 10년 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의 내놓은 개념으로 아직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004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사이언스 포럼에서 과학자들이 인류세 이론을 지지했고, 올 들어 영국·미국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부영양화(富營養化·eutrophication)=강·호수·바다 등 수중 생태계에 식물플랑크톤·조류(藻類)의 성장을 촉진하는 영양물질이 증가하는 현상. 비료 성분인 질소·인 등이 생활하수·축산폐수를 통해 수중 생태계에 유입되면 조류가 과도하게 번식한다. 그러다 성장이 한계에 이르면 조류가 사멸해 썩기 시작하면서 물속 산소가 사라져 죽음의 호수, 죽음의 바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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