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하이닉스 매각’ 혼란 부추기는 채권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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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지난 12일 하이닉스 매각을 둘러싸고 채권단 관계자 간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다. 한국정책금융공사 유재한 사장의 긴급 기자회견 때문이다. 유 사장은 이 자리에서 “구주(채권단 보유지분)를 많이 인수하는 기업에 가산점을 준다는 루머는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약속대로 구주 매각과 신주 발행을 병행해 인수기업을 정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구주를 몇 주 파느냐보다는 경영권 프리미엄의 총액이 중요하다”고 못 박았다. 경영권 프리미엄이란 주당 프리미엄에 인수 주식 수를 곱해서 계산된다. 인수 희망 기업들이 똑같이 구주 7.5%(채권단이 제시한 최저 한도)를 샀다면 구주에 대해 프리미엄을 많이 얹어 주는 쪽을 인수자로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반면에 신주 발행과 관련해선 아무 언급이 없었다.

 당장 인수전에 뛰어든 SK텔레콤과 STX가 반발했다. 한 업체 관계자는 “국어·영어·수학 세 과목 중 영어로만 채점하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유 사장 얘기대로라면 신주는 아예 안 사고 구주 7.5%만 매입하면서 프리미엄을 많이 쓰는 쪽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셈”이라며 “회사 투자 재원으로 쓰일 신주 발행은 신경도 안 쓰고 구주만 비싸게 팔아 채권단 배만 불리겠다는 의도”라고 비난했다.

 어느 한쪽을 편들 생각은 없다. 공적자금을 최대한 회수해야 하는 정책금융공사 입장도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하이닉스 매각은 일반 기업 매각과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반도체산업은 한국 경제의 핵심 기간산업이다. 신속한 투자 결정과 기술 개발 없이는 뒤처질 수밖에 없는 반도체업계에서 무려 11년을 은행 관리체제로 버텨 온 하이닉스의 생존은 어찌 보면 기적이다. 최근 일본의 엘피다는 25나노 공정을 적용한 메모리 시제품을 내놓고 19년 만에 한국을 역전할 기세다. 더 이상 하이닉스를 주인 없는 회사로 내버려둬선 안 된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매각 성사가 먼저고 프리미엄은 그 다음 문제다. 유 사장이 너무 욕심을 내고 있다. 하이닉스는 (외국에 팔 수도 없고 덩치도 커서) 인수자가 나오기 쉽지 않다. 자칫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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