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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앙드레김 1주기 … 외아들 김중도씨가 말하는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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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006년 앙드레김이 아들 김중도 대표 내외, 쌍둥이 손자·손녀와 함께 찍은 사진.

패션디자이너 고 앙드레김이 세상을 떠난 지 12일이면 1년이 된다. 3일 찾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앙드레김 아뜰리에’는 1년 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매장 안쪽에 있던 고인의 책상은 그대로였고, 자주 보던 책, 자주 듣던 음악 CD들도 그대로였다. 책상에 놓인 상패만 고인의 빈 자리를 확인시켜 줬다. 올 봄 조계종에서 수여한 불자대상 상패에 ‘고 앙드레김’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던 것. 고인의 아들 김중도(30) 앙드레김 아뜰리에 대표는 “아버지의 빈 자리가 워낙 커 유품은 아직 다 정리 못 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1982년 입양된 고인의 유일한 가족이다.

3일 서울 신사동 앙드레김 매장에서 만난 김중도 대표가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회고하고 있다. [신동연 선임기자]

 -앙드레김 패션쇼는 늘 화제였다. 스타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집에 TV를 3~4대씩 놓고 동시에 보셨다. 그러다 눈에 띄는 신인이 있으면 직접 전화를 해 패션쇼에 나와달라고 부탁했고 관계를 이어갔다. 배우 김희선씨도 그랬다. 스타가 커가는 과정을 신인 때부터 지켜보니 속속들이 그 사람을 알게된다. 중앙일보 제이섹션 인터뷰도 그래서 즐기면서 진행하셨다. 인터뷰를 좀 더 할 수 있었으면 아버님이 알고 계셨던 스타들이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아버지로서 앙드레김은.

 “중·고등학교 시절엔 간식거리를 사들고 직접 학교로 오셨고, 대학생 때도 하루에 몇 번씩 전화를 할 만큼 자상하셨다. 어릴 때 놀러가면 내 사진 찍어주기에 바빠 정작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예절교육만큼은 엄격해 어른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안 하면 눈물이 쏙 날 만큼 혼이 났다. 아버지는 외로움 때문인지 내가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으라고 성화였다. 손주들을 너무 사랑해 옷을 수십 벌씩 만들어주셨다. 우리 아파트는 아버지 집 바로 앞 동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들르기 힘들 땐 아버지가 손주들과 창문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85년 당시 서울 사간동에 있던 앙드레 김 아뜰리에에서 월터 주한 미국대사 부인과 앙드레김 부자. [김중도 대표 제공]

 -‘앙드레김 사업’을 하기가 힘들진 않나.

 “2006년 아버지가 대장암 진단을 받은 뒤 함께 지내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사업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2009년 군 제대 후엔 늘 매장에 나왔고 행사도 같이 다녔다. 또 30년간 아버지와 함께 한 임세우 실장과 파트너십으로 일하는 덕에 부담이 덜하다(※고인은 임 실장에게 신사동 매장 부지 절반과 경기도 용인시 소재 ‘앙드레김 디자인 아뜰리에’ 지분 80%를 유산으로 남겼다.)”

 -앙드레김 옷을 찾는 고객을 1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성악가나 클래식 연주자 등 옛날 고객은 꾸준히 온다. 성악가 조수미씨도 그 중 하나다. 골프·주얼리 등의 라이센스 사업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매출이 주춤했는데 지금은 원상태를 찾아가는 중이다. 앞으로 아웃도어·캐주얼 등으로 라이센스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아버지 뒤를 이을 후계자는.

 “아버지와 친했던 분들이 ‘명품으로 남으려면 후계 디자이너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고, 실력자를 추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 디자이너팀 6명은 아버지와 10년 이상 일한 분들이다. 당분간 이 분들이 앙드레김 옷의 철학을 유지시켜 주리라 믿는다.”

 -1주년 기념 행사는.

 “아직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남긴 1000여 벌의 옷도 창고에 그대로 있고, 유품도 정리가 안 됐다. 하지만 9월부터 용인에 유품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시작한다.”

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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