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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강조 ‘항미원조전쟁’ 뒤집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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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한 줌도 안 되는 남한을 지키기 위해 미군이 개입할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소련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기밀자료를 인용해 중공군의 참전 과정 등 한국전쟁을 재조명한 홍콩 정치학자 데이비드 추이(徐·57·사진) 박사가 그의 논문 『조선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에서 주장한 핵심 내용이다. 중국이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김일성의 도발을 승인하고 대대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추이 박사의 논문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주장하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입장에 배치되는 것이다. 지난해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중국 국가부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강조했었다. 추이의 논문은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주장한 내전론 또는 이승만 정부가 남침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 사관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추이 박사는 논문을 쓰면서 인민해방군 측으로부터 입수한 내부 자료들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기밀문서로 분류되는 바람에 11년 동안 중국에서 옥고를 치르다 지난달에야 석방됐다. 이 논문은 1999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제출된 것이다.▶<본지 7월 28일자 14면>

1949년 12월 29일 이오시프 스탈린(오른쪽)과 포즈를 취한 마오쩌둥의 모습. 홍콩 역사학자 데이비드 추이 박사가 중국군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에 따르면 마오는 미군이 남한을 지키기 위해 개입할 리 없다며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전쟁관’과는 배치되는 주장이다. [중앙포토]



 본지가 입수한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발행하는 '당대중국연구2호(2000년)'에 실린 논문 요약본에 따르면 1949년과 50년 두 차례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는 김일성의 6·25전쟁 계획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당시 마오는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약 7만 명 수준의 일본 지상군 을 파병할 것이며 절대 본국에서 미군을 차출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했다고 추이 박사는 주장했다. 일본 지상군과 한국군 정도는 중국이 인해전술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전쟁 준비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적잖은 순풍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추이 박사는 논문에서 시종 북한의 남침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전제한 뒤 논리를 전개했다. 추이는 “중국이 이 전쟁에 일찌감치, 그것도 매우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전쟁에 임박해서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역할 분담이 결정됐지만 중국에서는 일찌감치 참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주더 총사령관(左), 브루스 커밍스(右)

 50년 2월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주덕)는 만주까지 행군하던 인민해방군 42사단이 베이징을 경유할 때 만나 “한편으론 생산건설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참전할 때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압록강을 건넌 것을 두고 서방 학계 일각에서는 갑작스럽게 중공군의 참전이 결정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추이 박사는 이는 스탈린과 마오 사이의 불신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한다. 중공군이 확실히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확인한 뒤 소련의 무기 지급이 이뤄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스탈린이 중국의 국공(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때 장제스(將介石·장개석), 펑위상(馮玉祥·풍옥상·군벌 총사령관), 마오에게 무기 등 군사적 지원을 해주고도 한 차례씩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 때문에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6·25전쟁에서 명령의 시달자이면서 북한과 중국을 조종하고 훈련시키는 교관이었다고 추이 박사는 판단했다.

  추이는 대만 탈환이라는 공산당 차원의 역사적 사명을 뒤로 하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중공군이 뛰어든 주요인을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에서 찾았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이후 줄곧 스탈린의 지원을 받았던 마오의 부채 의식도 참전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 2차 국공내전 과정에서 소련으로부터 결정적 군사 원조를 받은 마오로서는 이 빚을 털고 가지 않은 채 대만 상륙을 위한 소련의 해·공군 지원은 요원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만주에 진주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일대의 팔로군에게 소련의 최신식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했던 마오로서는 스탈린의 보복 가능성도 신경 쓰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당신이 나의 승패에 관심 없다면 나도 당신의 생사에 관심을 끊겠다”고 위협했다고 추이 박사는 지적했다.

 논문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북한이 밀릴 경우 참전을 결심한 마오는 치밀하게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베이징의 공산당·군 수뇌부는 전쟁 발발 전인 50년 6월 22~26일 연일 회의를 소집했다. 전쟁을 전후로 한 국제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7월엔 일본 관동군이 쓰던 만주 일대의 31개 비행장 개·보수에 들어갔다. 추이 박사는 “이 정도 비행장 규모라면 미그기 2000여 대를 작전에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썼다.

◆데이비드 추이 박사=홍콩의 분석가들은 형식상 기밀을 누설한 죄가 추이 박사에게 적용됐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항미원조 전쟁관을 흔들어 괘씸죄를 물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입을 모은다. 11년 동안 수감됐다 지난달 석방된 그는 ‘자신은 무죄’라며 재심청구 의지를 밝혔다. 그는 1980년대 중반 홍콩으로 건너와 관영 신화통신에서 재직했다. 홍콩 중문(中文)대에서 정치행정학 석사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6·25전쟁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정치학)를 받았다. 그가 1981년 제출한 보고서 ‘홍콩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 제언’은 당 중앙에까지 올라가 지도부 인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항미원조 전쟁=내전 성격의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중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됐다는 주장.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이다.

“ 중국은 진작부터 이 전쟁에 치밀하게 깊숙이 개입했다. 1950년 5~10월 중공 수뇌부는 9차례 참전 관련 회의를 열었다”

“ 중국은 1950년 7월부터 일본 관동군이 쓰던 만주 일대의 31개 비행장 개·보수에 들어갔다. 비행장 규모로 볼 때 소련의 미그기 약 2000대가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 마오쩌둥의 머릿속에는 소련에 대한 부채 의식과 스탈린의 보복 우려 때문에 6·25 참전이 대만 수복보다 우선 순위였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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