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출신 아내와 5남매 남겨두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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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인천시 연수동 연수장례식장 2층. 한 40대 여인이 넋이 나간 듯 영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 천호동 상가 붕괴로 목숨을 잃은 김설태(45)씨의 아내 바올렛(41). 그의 옆에는 큰딸(15) 등 5남매가 엄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페루 출신인 바올렛이 한국 땅을 밟은 건 16년 전의 일이다. 건설 근로자로 페루에 온 남편 김씨와 사랑에 빠져 한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바올렛과 김씨는 한국에 온 뒤 5남매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빈소를 지키고 있는 김씨의 친척들은 “가난했지만 아이들 다섯 키운다고 김씨 부부가 얼마나 억척같이 살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바올렛은 학원 스페인어 강사 자리를 알아보는 등 여러모로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외국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벽은 높았다. 결국 생계는 일용 노동을 하는 김씨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빈소를 찾은 김씨의 친구들은 “김씨는 ‘자식이 많아서 먹고살기 어렵다’고 농담처럼 얘기하면서도 늘 ‘5남매의 아빠’라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어렵지만 단란한 생활을 이어가던 일곱 식구에게 20일 오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씨가 붕괴된 건물 속에 매몰됐다는 소식을 듣고 바올렛은 아이들을 데리고 바로 현장을 찾았다. 가족의 간절한 기도에도 김씨는 21일 오후 차가운 시신이 되어 그들 곁에 돌아왔다. 큰딸은 “아빠, 우리 이제 못 보는 거야?”라며 몇 번이고 아빠를 목놓아 불렀다. 둘째 아들(13)은 “며칠 전 아빠가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낚시터에 함께 갔다. 아빠가 낚시에 지렁이 끼우는 법도 알려줬다”며 눈물을 쏟았다. 넷째(4)와 다섯째(2)는 아빠의 죽음을 모르는지 큰 눈망울을 말똥거리고 있었다.

 빈소를 차린 지 수시간이 지난 뒤에야 바올렛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는 완벽하지 않은 한국말로 “우리 남편 일하다 억울하게 죽었어요. 이제 우리 여섯 식구는 어떻게 살아야 해요”라고 울먹였다.

남형석 기자·서동일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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