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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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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과 황순원(1915∼2000) 작가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미당·황순원문학상이 올해로 11년째를 맞았습니다. 올해 후보작을 지상 중계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발표된 최고 수준의 시와 단편소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시인·소설가 이름의 가나다 순서에 따라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핵 … 암 … 재난의 시대 탈출구는 어디

소설 - 강영숙 ‘프리피야트 창고’

‘프리피야트창고’의 주인공은 작품의 배경이 된 황학동이 구획별로 잘 정리돼 예전의 미로 같은 풍경을 잃은 것을 아쉬워한다. 강영숙 작가는 이를 “사람은 늙고 병들지만 도시는 늘 새롭게 변모한다는 것에 대한 질투”라 표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람이 늙어 죽는다는 건 옛말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사람은 이제 암으로 죽는다.

 강영숙(45)의 단편 ‘프리피야트 창고’(‘작가’ 2011년 여름호)의 주인공은 서른 살이 되면 암에 걸려 죽을 거라 믿는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교의 도시 프리피야트라고 생각한다. 체르노빌 사고가 난지 꼭 20년이 된 2006년, 주인공은 서른 살이 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 60세가 된 엄마 김영출씨가 ‘제일창고’를 딸에게 물려주곤 등산하러 훌쩍 떠난 게 사건이라면 사건이랄까. 창고를 물려받은 주인공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고의 이름을 ‘프리피야트’에서 따온 ‘프리창고’로 바꾼 것이다.

 설정만 봐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방사능의 공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나 작가가 원고를 마감한 건 지진이 일어나기 전인 2월이었단다.

 “지진 후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 선생께 전화했더니 ‘네가 만날 그런 걸 쓰니까 지진이 일어난 거잖아’라고 하시더군요. 우연인데…. 기분이 안 좋았어요.”

 일본에 소개된 강영숙의 단편 ‘해안 없는 바다’엔 푸켓을 덮친 쓰나미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프리피야트 창고’와 비슷한 시기에 마감한 단편 ‘문래에서’는 구제역을 다뤘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잡지가 녹색평론이에요. 이러다 세상이 뜨거워져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하죠. 정치보다 황사·기후변화 같은 것들이 사람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어느덧 강영숙에겐 “재난과 묵시록이 더 이상 비유나 상상이 아닌 21세기 초, 현실의 불안한 기미를 잘 포착해내는 작가”(허윤진 예심위원)라는 평이 따라다닌다.

  “암에 걸려 죽었다는 말은 그 사람의 개별성이나 시간을 묻어버리고 훼손해 폭력적인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을 내면화하고 살죠. 이런 시대엔 재해에 대한 불안을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작품에서 재해는 지극히 담담한 일상일 뿐이다. 주인공은 자기 눈엔 ‘쓰레기’일 뿐인 창고 속 물건을 정리한 뒤 다음과 같은 전단지 문구를 쓴다.

 “(…) 저처럼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을 거라 생각하시는 분들, 죽은 친구가 남긴 짐을 맡기실 분들, 어디론가 떠나 나타나지 않는 분들의 짐을 맡아줄 ‘프리창고’로 오세요.”

 죽은 남자친구의 휴대전화를 충전된 상태로 맡겨두곤 전화를 걸어 통화연결음을 듣는 여자, 손가락 마비로 더 이상 치지 못하게 된 기타와 악보를 맡겨두곤 가끔 찾아와 기타를 손질하는 남자 등이 창고의 고객이다.

 정홍수 예심위원은 “삶을 순식간에 쓰레기로 만드는 재난의 시대에 그 쓰레기화에 저항하는 공간으로서 ‘죽음, 기억, 추억, 보관할 수 없는 것을 보관해 주는’ 창고를 찾아낸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창고는 문학 혹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울림이 증폭된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프리피야트=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도시. 그 곳엔 방사능으로 유전자가 변이된 오렌지색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강영숙=1966년 춘천 출생. 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흔들리다』『날마다 축제』『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장편소설 『리나』『라이팅클럽』 등.

비틀어보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시 - 김정환 ‘귀’ 외 9편

가는 비는 세상을

씻어내리지 않고 세상을

적시지 않고, 가는 비는 세상의

귀지,

제 몸에 귀를 기울이는

귀지,

가는실잠자리 가는

장구채 위에 내리는

가는 비는

귀지.

시인 김정환씨는 1980년에 등단했지만 여전히 시가 젊은 시인 못지 않게 새롭다는 평을 듣는다. 삶과 언어와 감각을 언제나 민감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학동네 제공]

시인 김정환(57)씨는 문학상이라는 ‘제도’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특히 1년 동안 성실한 땀방울을 흘려가며 일군 시편(詩篇)을 심사 대상으로 하는 미당문학상과는 더 그렇다. 김씨는 어쩐지 열정적이고 급작스럽게 왈칵왈칵 시를 쏟아낼 것 같다.

 그는 최근 몇 년간 믿을 수 없는 생산력으로 장시집 세 권을 잇따라 펴냈다. 368쪽짜리 『드러남과 드러냄』(2007년), 579쪽짜리 『거룩한 줄넘기』(2008년), 487쪽짜리 『유년의 시놉시스』(2010년) 등이다. 나눠 발표한 걸 묶은 게 아니라 써뒀다 한 번에 펴낸 전작(全作)이다 보니 문예지에 한 두 편씩 시를 발표할 수 없었고, 따라서 심사할 시가 없었다.

 상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그런 작업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등단 초기 현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 80년대 중반 이른바 ‘선전선동시’ 시기를 거쳐 일종의 문명사적 조망을 시도하는 최근까지, 그의 문학반경은 광활하다. 문화기획자로서 그는 인터넷 문화예술학교를 운영했고, 전라도 광주를 문화중심도시로 키우는 국가사업에도 관여했다. 이런 그를 가두기에 문학상은 너무 반듯해 보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상을 주겠다는데 마다하지는 않을 터. 김씨는 바쁜 와중에 ‘기습적으로’ 열 편의 시를 계간 ‘자음과모음’ 올 봄호에 발표했다. 주목 받는 여성 시인 김이듬씨와 같은 수의 신작 시를 선보이고 평론가 황현산씨와 좌담을 하는 특집을 위해서다. 이 열 편이 고스란히 이번에 미당 후보작이 됐다.

 김씨는 시와 산문에 두루 능하다. 어떤 찰나의 느낌을 근사(近似)하게 되살려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번 후보작 열 편 중 일곱 편은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이라는 큰 제목으로 묶은 연작시다. 이에 대해 평론가 황씨는 “어떤 정신 기계, 훌륭하고 부지런한 수 만 마리의 말이 한꺼번에 돌리는 기계”가 연상된다고 평했다. 그만큼 죽음의 다면적인 양상을 현란하게 전한다는 것이다.

 연작시는 모기·거미·간장 게장 게 등의 입을 통해, 또 LP 음반, 수(數)의 역사 등에 비춰 죽음에 대한 김씨의 요즘 생각을 담고 있다. 시들은 우선 익살스럽다. 간장에 절여진 게가 자신이 단지 ‘질긴 목숨 산 채 독한 간장 속 느리게 끊어져/생긴 울화의 맛? 밥도둑?’이냐며 음식으로만 보는 인간의 시각을 꼬집는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시의 핵심 메시지는 쉽지 않다. 장시집 세 권에서 갈고 닦은 예술·역사·인간 등에 대한 김씨의 사유가 농도 짙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장시집과의 연관에서 읽어야 뭔가 보인다는 얘기다.

 ‘귀’는 소품이다. ‘세상을’‘세상의’가 이루는 1~3행의 각운(脚韻), ‘가는 비’와 ‘귀’를 동격으로 몰아 미세한 비 소리를 부각시키는 솜씨, ‘가는실잠자리’‘가는장구채’ 같은 말들의 여린 맛 등이 재미있다.

신준봉 기자

◆김정환=1954년 서울 출생. 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황색예수전』『사랑, 피티』 등 저서 100여 권. 백석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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