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튀는’시대에 등장한 매너리즘 미술의 逆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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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성모가 앉아 있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무릎 위에 누워 있다. 주제는 일반적인 성모자상이지만 왠지 불안정해 보이는데다 세속적인 느낌마저 강하다. 무엇 때문일까?

화가는 성모의 거룩함이나 아기 예수의 신성 같은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자신의 화풍이 지닌 독특함이나 개성을 강조해 무언가 남과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하다. 나 자신만의 성모, 나 자신만의 예수를 창조해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성모의 자태를 보자. 목이 지나치게 길어 보인다. 그림의 제목이 ‘목이 긴 성모’가 된 것도 그런 탓이다. 몸은 뱀처럼 S자 형태로 흐느적거리듯 휘어 있다. 게다가 옷을 입었음에도 젖꼭지나 배꼽이 부각돼 상당히 관능적인 인상을 준다. 아기 예수 또한 아기답지 않게 기다란 신체 구조를 갖고 있어 마치 에일리언 같은 느낌을 준다. 길게 그려진 화면 뒤의 기둥이 이 길다란 인물상들의 불균형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파르미지아니노(1504∼40년)
이다. 이탈리아 파르마의 한 유력 가문으로부터 의뢰받은 제단화인데, 그림을 끝내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미완성 작품임에도 이 그림은 오늘날 매너리즘 미술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파르미지아니노의 ‘튀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미술사에서는 이같은 매너리즘 미술을 매우 폄하했다. ‘매너리즘’이라는 말이 흔히 상투성, 진부함을 뜻하는 데서 알 수 있듯, 파르미지아니노 류의 그림은 사실상 선배들(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대가)
의 전통을 삐딱하고 진부하게 왜곡한 형식주의적 미술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매너리즘 미술은 어쩌면 미술사상 최초의 현대적 개성을 강조한 미술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그 시대가 격심한 사회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매너리즘 시대는 르네상스 전성기 직후에 해당한다. 르네상스를 통해 예술가들은 엄청난 신분의 변동을 겪었다. 구두공이나 가구공과 사회적 지위가 다를 바가 없었던 미술가들이 졸지에 천재로 대접받으며, 교황과 제후의 궁을 수시로 드나들게 됐다. 돈도 엄청나게 벌었고 명예도 얻었다. ‘딴따라’에서 ‘스타’로 연예인의 지위가 상승한 최근의 우리 대중문화사와도 비교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이런 출세를 보면서 후배들은 자신들도 그와 같은 ‘성공시대’를 열고 싶었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더욱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인물을 ‘쓸데없이’ 길게 그리거나, 포즈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뒤틀거나, 핑크색 등 ‘야한 색’을 강조하는 등의 시도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개성에 대한 집단적인 강박은 미술사에서 이때 처음 나타난 현상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지배계층이 상당히 귀족화돼 있었다는 사실도 이들의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상업자본가에서 출발해 금융자본가로 권력을 잡은 메디치가를 비롯해 많은 대부르주아자들이 이제 사실상의 귀족이 돼 버렸다. 귀족이 된 그들은 합리적인 르네상스 고전주의보다 극단적으로 세련되고 개성적인, 심지어 신경질적인 스타일을 요구했다. 튀고자 하는 화가들의 욕망과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다. 또 이 시기의 이탈리아는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한데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범, 독일 카알 5세의 로마 약탈,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 권위의 추락 등을 경험하면서 거의 종말론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르네상스가 지중해 경제권의 부상으로 가능했다면 대서양 경제권의 부상은 르네상스의 침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회적 불안정과 귀족적 취향의 증대는 튀어야 한다는 화가들의 절실함과 맞물려 매너리즘 미술을 양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만큼 근대적인 개성의 시대-현실과의 부조화로 자살하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예술가가 나오는-를 최초로 열게 됐다. 파르미지아니노 역시 우울증에 걸려 폐인처럼 죽었다.

이주헌 아트스페이스 서울 관장 <이코노미스트 제5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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