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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 화가’ 취급받다 36세 요절, 시대 잘못 타고난 천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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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호 32면

인물을 둥글둥글하고 풍만하게 그려 많은 미술애호가의 사랑을 받는 화가가 있다. 콜롬비아 태생의 풍자화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는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30대 중반 이후 재능을 인정받아 명성과 부를 함께 얻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당대에 안정된 여건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미술가는 드물다. 이탈리아 태생의 유대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사진)는 유독 짧고도 불행한 생을 마친 천재화가였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의 조그만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지중해계 세파라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인 데 대해 나름대로 긍지를 가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열 살이 되면서 병치레를 시작했다. 늑막염·폐결핵·폐렴 등으로 14세 때 중학교를 자퇴한 뒤 그림 개인교습을 받았다. 17세에 폐결핵이 다시 도져 요양차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돌며 중세 르네상스예술에 심취했다.

모딜리아니는 22세 되던 해(1906년)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간다. 몽마르트르 언덕 부근의 허름한 숙소에서 조각과 회화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루마니아 현대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권유로 한때 조각에 매달렸으나 석재(石材)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손상되자 그림에만 전념한다.

유대인 정체성에 자부심 유작 314점
모딜리아니는 프랑스 후기인상파 대가인 폴 세잔과 아르 누보(Art nouveau)의 기수이며 인물화가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을 많아 받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는 아몬드 모양의 눈, 달걀형 얼굴, 긴 목, 긴 코 등이 특징적으로 등장한다. 파리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 인물, 여성의 누드를 주로 그렸다. 그는 모두 314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꽃 파는 여인’ ‘폴 기욤의 초상’ ‘퐁파두르 부인’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는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며 ‘유대인 여자’(1908)라는 초상화 한 점을 남겼다. 1912년엔 파리 가을미술전 ‘살롱 도톤’에 처음으로 작품을 출품했으나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미남인 그에겐 자진해서 모델을 서주겠다는 여인들이 항상 주변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빈한했고 초상화 한 점에 10프랑(약 2달러)밖에 못 받는 무명 화가로 살아나갔다.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화파(畵派)에 속한다. 일명 몽파르나스 화파로도 불린다. 이 그룹은 3개 시대로 나뉜다. 모딜리아니는 1기(1900∼20년) 에콜 드 파리를 대표한다. 프랑스에는 시대별로 많은 화풍이 있었지만 에콜 드 파리는 특정 화풍은 아니다. 주로 동유럽 등 외국에서 온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 작품 활동을 하던 집단을 말한다. 이 화파에 속하는 인물은 모딜리아니와 같이 대체로 유대인이 많았다. 벨라루스 태생의 마르크 샤갈과 섕 수틴, 리투아니아에서 온 자크 립시츠, 불가리아 출신의 줄스 파스킨, 폴란드 태생의 모이즈 키슬링 등이다. 이 그룹에 속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유명 화가로는 스페인 말라가 태생의 파블로 피카소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파리 시내 6구와 14구에 걸친 몽파르나스 가에는 외국 화가, 음악인, 문인들이 모여 창작활동을 했다. 공산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미국 문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에즈라 파운드 등도 이 예술인 구역을 거닐었다.

1917년 모딜리아니는 14세 연하이며 화가 지망생인 잔 에뷔테른(Jeanne Ebuterne)이라는 프랑스 여성을 만난다. 중상류 가정인 잔의 집안은 모딜리아니가 병약하고 술과 마약에 찌든 건달이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결합에 반대했지만 둘은 동거에 들어간다. 이후 잔은 모델로 모딜리아니의 작업을 성심껏 도와준다. 모딜리아니는 1917년 12월 폴란드 태생의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의 주선으로 베르트 베유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 이 전시회는 외설로 비판받았다. 결국 당국의 검열로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한 채 전시회는 중단되었다.

‘소파에 앉은 누드’ 6900만 달러에 거래
모딜리아니는 1918년 남부 니스에서 잔과 1년간 요양했다. 그해 딸 지오바나가 태어났다. 다음 해 5월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1920년 1월 이 불운한 천재화가는 파리 자선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짧은 일생을 마친다. 임신 8개월이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숨진 지 이틀 후 친정집 5층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비극적 순애보다. 아마 잔은 천국에서도 모딜리아니의 작품 모델이 돼 불행했던 천재화가를 계속 도우려 했는지 모른다. 모딜리아니는 문화·예술인의 성지인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야속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후부터는 그의 작품이 비싼 값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2010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1917년 작품인 ‘소파에 앉은 누드’가 6900만 달러에 팔렸다. 그리고 에뷔테른의 초상화 한 점도 20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생존 시에는 작품 한 점에 10달러도 받지 못한 이 불행했던 대가의 명작이 이제는 엄청난 거금에 거래된다. 많은 세계 부호들은 초고가의 미술품 소유를 과시용 부의 척도, 아니면 안전자산 확보와 투기 수단으로 여긴다. 생애 마지막 반려자 잔과 함께 저 세상에서 쉬고 있을 모딜리아니는 아마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쉴 것이다. “이 속물들아, 살아 있었을 때나 좀 평가해주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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