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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회화 선구자 카라바조의 실체, 400년 전 경찰 기록서 찾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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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호 04면

A ‘세례자 요한’, 캔버스에 유채, 132x98.5㎝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로마, 복사본 B ‘세례자 요한’, 캔버스에 유채, 129x95㎝ 카피톨리네 미술관, 로마

여기 두 그림이 있다. 약간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윤곽선이 거의 일치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림 A(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소장)에서는 소년의 시선이 살짝 비켜가 있는 반면, 그림 B(카피톨리네 미술관 소장)에서 소년의 시선은 조롱하는 듯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다. 1600년경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소년 시절의 세례 요한을 그린 것인데, 둘 중 어떤 그림이 원본일까? 1952년 한 전문가에 의해 그림 B가 발견되면서 두 그림의 진위 논쟁이 시작됐다. 그 전까지는 그림 A가 원본으로 여겨졌다. 몇몇 학자는 안목 감정으로 그림 B를 원본이라고 말했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20> 조너선 할의 『로스트 페인팅』

1 39로스트 페인팅39(2007, 예담)

그러나 안목 감정이 전부는 아니어서 문서증거와 기술분석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마침내 89년 엑스레이, 적외선촬영기, 가스크로마토그래프 등 첨단 과학 기구를 이용한 기술분석 과정에서 그림 그리는 도중에 생긴 수정 자국인 펜티멘토가 그림 B에서 발견됐다. 그림 A는 아무것도 없이 말끔하고 완벽하게 그려졌다. 어느 것이 원본이겠는가? 원본 그림의 윤곽을 그대로 베끼는 사람에게는 수정선이 필요하지 않다. 그림 B가 원본이고 A가 복사본이다. 이로써 40년 가까이 끌어온 논쟁이 종지부를 찍게 된다. 동시에 새로운 그림을 찾는 모험이 시작된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문서 증거를 찾는 중에 200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카라바조의 다른 그림, ‘그리스도의 체포’ 그림의 추적이 시작된다.

조너선 할의 논픽션『로스트 페인팅』(예담, 1만원)은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의 체포’라는 카라바조의 두 그림을 둘러싸고 실제로 있었던 미술사적인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다룬 책이다. 논픽션 작가인 조너선 할은 94년 뉴욕 타임스에 ‘그리스도의 체포’의 발견에 관한 기사를 쓴 후, 수년간에 걸친 실존 인물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논픽션이지만 할리우드 영화적인 캐릭터화를 통해 복잡하고 지루한 미술사적 지식을 지적인 흥분으로 가득찬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책을 이끌어나가는 세 명의 주인공은 각각 안목, 끈기, 행운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들은 미술사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들이다. 캐릭터별로 정리해보자.

1.데니스 마혼:영국인, 카라바조의 세계 최고의 권위자. 이 책의 안목 담당이다. 1952년 로마 시청 시장실에서 ‘세례자 요한 B’를 발견한다. 마혼은 기술분석이나 문서 검증 없이도 먼지에 뒤덮여 있던 작품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안목 감정이라 부르는 것인데, 소위 미술계의 타짜들은 이 ‘안목 감정’을 제일로 친다. 안목은 작품에 내재한 예술혼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안목은 미술사적 지식의 총합을 넘어서는 것으로, 일종의 재능이며 오랜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다. 여든이 훌쩍 넘은 그는 자신의 생전에, 망실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체포’가 발견되기를 꿈꾼다.

2.프란체스카 카펠레티:이 책의 끈기 담당. 로마대학 미술사학과 박사 학생. 그녀가 생각하는 완벽한 일은 “평생 도서관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영원히 학생으로 늙어가는 것”이다. 낡은 문서 자료실에서 자료 두 쪽을 검토하는데 두 시간이 걸리는 고단한 작업을 하며 그녀는 ‘그림의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타고난 성실성과 끈기로 89년 마테이 문서보관소에서 기록을 찾아내 ‘세례자 요한 B’가 원본임을 학술적으로 증명하는 데 공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체포’의 문서 기록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3.세레조 베네데티:행운 담당.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아일랜드에 왔다. 어느 날 한 낡은 그림의 복원 의뢰가 들어오는데, 그게 바로 오래전 망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체포’다. 베네데티 덕분에 작은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은 중요한 작품을 소장하게 된다. 누군가의 행운은 누군가의 불운이다. 프란체스카가 추적한 문서기록에 의하면 이 작품은 1802년 한 스코틀랜드 갑부가 원소장자로부터 구입해 영국으로 왔다. 20세기 초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은 이 갑부의 소장작품들을 전시하고 일부를 사들이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리스도의 체포’는 거절했다. 좋은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행운을 놓친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은 1921년 이후에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그림은 영국 어디에 있을 거라고 추정될 뿐이었다. 바로 그 그림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 행운으로 평범한 복원사였던 그는 미술사에 작지만 불후의 명성을 남기게 되었다.

망망대해의 섬처럼 떠 있었던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의 체포’의 발견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구슬처럼 꿰어지고 각자의 특기로 작품이 진품임을 확인하는 데 기여한다. 4000만~5000만 파운드(약 800억~10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작품의 발견으로 학계는 발칵 뒤집혔고, 전 세계 ‘카라바조병’ 환자들은 전율했다.

물론 이 책의 진짜 주인공,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화가 카라바조다. 조너선 할은 논픽션 작가의 냉정함과 특유의 상상력으로 카라바조의 모습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그가 의거한 것은 13건의 경찰기록이다.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시작을 알린 화가 카라바조(1573~1610)는 노름꾼에 살인자였다.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로 객사를 했으니 죽음도 곱지 못했다. 섹시한 성모, 미천한 거렁뱅이 같아 보이는 성자들 등 사실주의적인 그의 그림은 곧잘 스캔들에 올랐다. 노름, 음주, 폭행 등 온갖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28살에 카라바조는 이미 로마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였다. 동시대 사람들은 본받을 것 없는 살인자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까 두려워했다. 그는 사후에 완벽하게 잊혀졌다. 사인을 하지 않던 당시의 습관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체포’ 역시 엉뚱한 작가의 이름으로 알려져 역사의 그늘 속에 잠겨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스캔들에도 그는 17세기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였다. 죽은 지 300년도 더 지난 1950년대 재발견된 이후, 발간된 연구 논문 및 관련 도서만 3000권에 이른다. 미술계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카라바조에 심취한 ‘카라바조병’에 걸린 사람들이 왕왕 등장한다. 현재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60~80점인데,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작품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늘 그렇듯이 할리우드 영화를 닮은 논픽션 작품들은 “To be continued”의 여운으로 마무리된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마테이의 둘째 아들이 잠깐 소장했던 성 세바스천 그림을 300 년 전에 누군가 프랑스로 가져갔다”는 300년 전의 기록을 언급한다. 이번에는 프랑스다. 잃어버린 카라바조를 찾는 드라마가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나 계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림마다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을 테니까.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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