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디스카운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5호 35면

‘왕서방연서’는 원로가수 고(故) 김정구씨가 1938년 발표한 노래다. 비단 판 돈으로 구애했던 명월이가 변심하자, 왕서방은 돈이나 벌자며 ‘띵호와’를 외치고 떠났다는 스토리다. 여기서 중국인 왕서방은 빈틈 많고 돈만 좋아하는 장사치로 풍자됐다.

On Sunday

그랬던 왕서방이 언제부턴가 ‘중국 경제를 이끄는 엘리트 기업인’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바뀌었다. 국내에서 비단장수 왕서방의 기업가 정신이라는 책이 나왔을 정도다.

주식시장에서도 왕서방의 인기는 뜨거웠다. 2007년 8월 국내 주식시장에 중국의 정보기술(IT) 부품 업체인 3노드디지탈이 상장했다. 외국 기업 상장 1호였다. 상장 첫날 2500원으로 거래를 시작한 이 주식은 11일 만에 5배가 넘는 1만3800원까지 올랐다.

그 뒤 4년여 동안 국내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은 15개로 늘었다. 하지만 3노드디지탈이 받았던 융숭한 대접은 옛날이야기다. 올 들어 지난달 28일까지 중국 기업의 주가는 평균 29% 하락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0.6% 올랐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원인은 ‘차이나 디스카운트(China Discount)’다. 네티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차이나 디스카운트에 대해 “한국 주식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주식값이 한국 기업보다 평가절하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회계 불투명과 지배구조상의 문제점에도 기인하지만, 투자자들 자신의 불안감이 주된 이유”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상당 부분 맞는 말이지만 인과관계가 뒤바뀌었다. 오히려 “회계와 지배구조의 문제점 때문에 투자자들이 불안감을 갖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고쳐야 현실에 가까운 설명일 듯하다.

차이나 디스카운트의 과정을 살펴보자. 결정타는 지난 1월 상장한 중국고섬이었다. 이 종목은 3월에 자회사 회계 문제로 거래 정지됐다. 결국 1일 금융감독원은 ‘중국고섬 자회사 은행 잔고가 회계장부에 적혀 있는 수치보다 1600억원이 부족하다’고 발표했다. 상장폐지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기업들은 이전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됐다. 연합과기는 회계 기록 부실로 상장 폐지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차이나하오란은 2대 주주의 지분 처분 사실을 뒤늦게 알려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줬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중국원양자원이 어선도 없으면서 똑같은 사진을 조작해 홈페이지에 26척이 있는 것처럼 올렸다는 의혹에 휩싸여 최고경영자가 직접 해명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주식시장을 운영·감독하는 한국거래소는 부랴부랴 외국 기업 관리를 위한 태스크포스를 만들었지만 아직까진 뾰족한 수를 못 찾고 있다. 거래소 담당자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독일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사고를 냈다. 섣불리 규정을 강화하면 자칫 중국 기업의 한국 증시 상장 행렬이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당장 내 돈 잃은 투자자들에게 “미국·독일 투자자도 피해를 봤으니 그걸로 위안 삼으라”는 식으로 들릴 수 있어서다. 설사 규정을 강화해 중국 기업의 상장이 위축되면 어떤가. 투자자들이 진짜 원하는 건 거짓말하는 왕서방 10명보다 똑바른 기업가 정신을 가진 왕서방 한 명이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