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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꼬박, 30년을 팠다…이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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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착하게 사는 게 좋을걸.”

오늘도 그의 판화가 속삭인다. 남들만큼 뭔가 얻고 지킨답시고 분주한 마음에 시골 바람이 살짝 분다. 충북 제천 박달재 아래서 이철수(57)가 인터넷으로 매일 날리는 ‘나뭇잎 편지’. 2002년부터 했으니 어느덧 10년이다. 매일매일 이 편지를 받기로 등록한 회원이 6만 명을 넘었다.

마침 그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30년 전, 독학의 판화가가 데뷔전을 열며 참여미술을 지펴 올린 서울 관훈동 관훈미술관(현 관훈갤러리). 바로 그곳에서 다음 달 12일까지 회고전을 연다. 1981년 스물일곱 이철수는 장판에 콜타르로 한센병 환자들, 앉은뱅이를 그렸고 함께 싸우자 했다. 90년대, 귀농한 그는 도인이 다 됐다. 판화에서 그는 우리에게 하찮은 것들의 소중함을 말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온몸, 온 마음’을 얘기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나니까. 판화를 닮아가는 그가 조곤조곤 말한다. “비판의 소리만 내고 살아야 할 때도, 그리고 내 일 내가 하고 살아도 여전히 힘들 때,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스스로 묻곤 했습니다. 스스로 내린 답은 내 삶과 내 존재의 주인 노릇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다시, 바람이 분다. 마음이 한 자락 흔들린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느덧 30년이다. 땅 파던 손으로 거의 매일 글과 그림을 나무판에 팠다. 1981년 관훈미술관에서 처음 전시했을 때, 인파가 몰려 마지막 날 문을 닫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했다.

“촌놈 초짜가 너무 인기를 끌었죠. 전시는 다 그런 줄 알았더니 계속 하다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30년은 데뷔전을 열었던 스물일곱 독학의 판화가가 환갑을 바라보는 장년이 된 시간이고, 아내를 만나 두 아이가 커가는 걸 지켜본 시간이다. 그를, 그의 판화를 지켜본 우리도 함께 자라고 늙었다. 그간 쌓인 5000여 점 중 113점을 골라 이번 회고전에 걸었고, 505점을 골라 30년 선집 『나무에 새긴 마음』(컬처북스)도 펴냈다.

“30년 됐다고 바깥 사람들이 전시도 해보자고 하고, 책도 내보자고 하는 건 참 고맙고 복받은 일이다 싶었어요. 30년간 한눈 안 팔고 걸어올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30년을 깎고, 그리고, 쓰셨네요. 당신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그림에 늘 이야기를 담아요. 그 이야기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착하게 사는 게 좋을걸’ ‘말 한마디라도 곱게 하고, 이왕이면 나누는 게 어떻겠나’ 하는 거예요. 그림으로 말해 놓은 게 많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너 진짜 그렇게 살고 있어?’ 하는 눈빛으로 절 보는 것 같았어요. 해서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제가 막살지 못합니다. 판화를 만들어 놓은 게 족쇄처럼, 그림이 도리어 저를 지켜주는 존재가 된 듯 해요. 나쁘진 않아요. 포르노처럼 그리는 사람은 여자랑 연애해도 추문이 아닐 텐데, 제가 그럴 순 없잖아요.”(웃음)

여기 우리와 함께, 24×23㎝, 고무판, 1983

밥이 하늘입니다, 33×36.5㎝, 목판, 1987

우산, 42×50㎝, 목판, 1994

새는 온몸으로 난다1, 93×125㎝, 목판, 2010

-전시로는 6년 만입니다. 새로운 게 있나요.

“이번 그림 보시게 될 분들과 화두처럼 얘기해 봐야겠다 싶은 것은 독수리 그림입니다. 판화로는 크기도 크고요, 칼질도 정밀합니다. 기존의 선묘와는 다른 사진적 효과를 냈습니다. 독수리의 비상을 육박하는 힘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안 하던 짓을 좀 했어요. 이번에는 특히 온몸, 온 존재, 온 마음을 화두로 끌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어서요.”

-그 판화에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고 쓰셨네요.

“저를 두고도 그러셨지 싶은데요.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계속 궁금해하시고 물으셔요. 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갈등, 즉 국경 갈등, 좌우 갈등이 좀 지워진 시대인데도요. 그리고 온몸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들이 없었던 것 같아서요.”

-농사 지으랴, 책 읽으랴, 글 쓰랴, 판화도 하랴. 대체 언제 이 일을 다 하시나요.

“따로 작업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예요. 한겨울에 밑그림을 많이 준비해 뒀다가 봄부터 자투리 시간을 내요. 일하다 들어와서 판화 작업하고, 작업하다 말고 나가서 일해요. 사람들과 얘기하면서도 계속 판 새기고요. 농번기라도 저녁 먹고 들어오면 작업실 와서 책 보거나 판 새겨요. 그림이 감이 오느니 마느니 그런 한가한 소리 하고 있을 시간 없어요. 예술가들처럼 분위기 잡다 필 꽂히면 하고 그런 거 없어요.”

-선생은 화가입니까, 농부입니까, 글쟁이입니까.

“지금도 내가 화가인가 생각할 때가 많아요. 저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제가 살아가는 일이 이승에 와서 잠시 주어진 배역을 살다가 가는 거다 싶을 때가 많아요. 그렇다면 이왕이면 악역은 하지 말고 선한 배역을 해야겠다 생각할 때도 있고요.”

-한때 투사(鬪士)셨잖아요.

“아녜요, 얼치기였어요. 젊은 나이에, 정치권력이 폭압적이었을 때, 최소한 뭔가는 하고 살아야지 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죠. 이번에 선집(選集) 만들려고 작업 뒤져보다 보니 부정할 수 없는 내 한 시기였고, 여전히 우리 현실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고. 이런 한 시기 내가 뭘 얘기해야 할까를 지금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림으로 하려고 해요.”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요.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기 어려운 시대, 다들 바빠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혹은 욕심으로 뭔가 얻고 싶어서, 나남 없이 그렇게 살다 보니 눈에 보이는 뭔가로 자신을 얻고, 그걸로 자신을 긍정하려 하다 보니, 세상에서 뭔가 얻은 것이 없는 사람은 그걸 얻느라, 얻은 사람은 그걸 지키느라 자신이 소외되는 세상이죠. 나라고 다를 바 없고요. 그래서 제가 그린 그림은 제 반성문이에요. 농사 짓고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은 그렇게 살면 좀 나을까 싶어서….”

-좀 낫던가요.

“괜찮은 도량이라 생각해요. 생명과 만날 수 있는 삶이고, 단순하게 살 수 있고요. 저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있지만 그보다 농사 짓는 삶이 더 좋고요. 저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예요. 농사를 짓거나, 굳이 서울 근교에 거처를 두지 않고 변방으로 가서 사는 것도 큰 물에서 노는 게 낯설고, 거기서 뭔가 얻으려 하고 세상에 뭔가 걸어놓고 사는 삶에 끌려다니는 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달력·머그컵 등 아트 상품도 많이 나오고 하니 ‘말랑말랑해졌다’‘상업화됐다’‘대중화됐다’고들도 하는데요.

“그렇게들도 얘기하죠. 옛날에도 서정적인 건 많았는데, 그야말로 원하는 그림만 보는 거니까. 사람들이 돈 주고 그림 사기는 힘들잖아요. 저는 가능하면 큰 돈 안 들이고 제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얘기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걸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판화만 하다 보면 다른 장르에 욕심이 날 법도 한데요.

“지금도 눈 침침하고 힘들어서, 붓으로 하고 치울까 싶기도 해요. 워낙 밑그림으로 동양화붓을 썼고, 붓은 익숙한 매체니까요. 물론 수묵이라는 것도 ‘그리고 치우는’ 단순한 세계가 아님을 알지만요. 판화를 평생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난시도 있고, 눈이 피로해서. 무슨 이야기로 이걸 마무리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시콜콜 본인은 농사 흉내만 낸다지만 …

손가락에 붕대 칭칭, 판 깎다 다친 게 아니라 풀 깎다 그랬답니다

“저 농사꾼 아녜요. 농사 흉내 내는 거지.”

그가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농사, 전원생활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귀농 성공사례로 인터뷰하자는 이도 있었단다.

이철수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그런 시선을 불편해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상경한 이 사람, 왼쪽 검지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전시 앞두고 작업량이 많아졌을 테니 판 깎다가 다쳤겠지’ 싶었다. 천만의 말씀, 마당에 난 풀 깎다가 그랬단다.

하루 일과도 농부의 그것이다. 오전 5시, 눈 뜨자마자 논밭 한 바퀴 둘러보고 아침거리 푸성귀를 뜯어다 씻는다. “피사리(피뽑기) 하고, 물 봐야 하고, 풀 깎고. 일 많을 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해야 할 때도 있고….”

6612㎡(2000평) 농사다. 쌀·콩·된장·고추장·김장거리 등 땅에서 나는 건 자급자족한다. 그러고 남는 것은 지역 복지관에 보내기도, 좋아하는 이들과 나눠 먹기도 한다. ‘흉내’라기엔 규모가 있지만 팔지 않으니 직업 농부는 아닌 셈이다.

그래서 선생은 미안한 게다. 농사를 생계 수단으로 치열하게 하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나서서 농사 얘기한다는 것이. 반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뒤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 썼다. “나는 램프등 밑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를 드는 것과 같은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이철수는 땅 파던 손으로 나무판에 자기 지문을 새긴다. 밭고랑 모양으로. 그는 농민화가다.

연일 비가 쏟아진다. 인터뷰 중 “장마철 앞두고 비설거지 해 놓고, 비오면 우비 입고 장화 신고 나가야 하고…”라던 그다. 전시 준비로 바빴을 텐데 논 물꼬 조절해 둑 무너지지 않게 채비는 잘 해 두셨나 모르겠다.

이철수가 걸어온 길

1954년 서울 출생
1981년 첫 개인전 ‘이철수 판화전’(관훈미술관, 서울)
1987년 서울에서 충북 제천군 백운면 평동리로 이주, 현재까지 거주. 이때부터 매년 판화 달력 펴냄.
1989년 함부르크 대학 초청 독일 순회전, 스위스전
2003년 미국 시애틀, 노스캐롤라이나서 초대전.
2011년 이철수 목판화 30년 기획 초대전 ‘새는 온몸으로 난다’(관훈갤러리, 서울)

*이외 국내외 전시 다수 출품.
판화집, 엽서 산문집 등 여러 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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