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넘어서
① 자결자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사를 말하다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臨時韓國派遣隊司令部)에서 일본 정규군을 동원해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남한 대토벌’을 자행하던 1909년 가을. 전라도 구례의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귀국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순탄한 듯 보이던 그의 벼슬길은
김택영은 1914년 장건에 대해
김택영과 황현은 모두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건창은 철종·고종 때 판서를 역임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음독 자결한 이시원(李是遠)·지원(止遠) 형제의 손자였다. 또한 조선 양명학을 뜻하는 강화학파의 적자였다. 이건창은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았지만 부화뇌동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동학(東學)도 문제였고 개화파도 문제였다.
이건창은 고종 13년(1876)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목도한 농가의 참상을 ‘농가의 추석(田家秋夕)’이란 시로 남겼다. “서울 부호 집은 항상 좋은 시절이지만, 가난한 농촌사람에겐 추석만이 좋은 때라네(京師富貴地 四時多佳節 鄕里貧賤人 莫如仲秋日)”로 시작된다. 남편은 굶주림을 참으며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남편이 심은 벼를 수확한 추석날 “유복자 안고 죽은 남편을 향해 오열하다가, 기절한 지 오래지 않아, 돌연히 아전들이 사립문을 부수며, 세금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다(抱兒向靈語 氣絶久不續 忽驚吏打門 叫呼覓稅粟)”로 끝난다.
한성부소윤 시절에는 사실상 상왕 노릇을 하던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부하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에게 맞서 가옥·토지 매매를 금지시킬 정도로 백성을 아꼈다. 이건창에게는 시세(時勢)가 아니라 중심(中心)이 중요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무력 진압한 고종 31년(1894) 서울을 떠나 강화도 사기리로 낙향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공조참판을 제수했으나 거부했고, 고종 35년(1898) 만 46세로 숨을 거두었다.
김택영이 다시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현은 서울에 사는 이건창의 종제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과 함께 강화도로 떠나 이건창의 아우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을 만났다. 이건승이 을사늑약 체결 후 황현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황운경(黃雲卿:황현)께서는 아직도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습니까? 이보경(李保卿:이건승)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구차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살아 있는 것은 다 정상적인 도리가 아닙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가 그들의 마음이었다. 황현·이건방·이건승은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의 묘를 찾았다. 이건창의 무덤에 술잔을 붓고 절을 올린 황현은 죽은 친구에게 오언율시를 준다. “외롭게 누웠다고 슬퍼하지 말 것을,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잘못된 세태와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기에 이건창은 살아서도 혼자였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先兄: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義)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고도 말했었다. 그랬다. 성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선비들은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성묘를 마친 황현·이건방·이건승은 서울로 올라와 남산에 올랐다. 이미 남의 것이 되어 버린, 껍데기만 남은 궁궐이 멀리서 보였다. 통곡한 황현은 다시 고향 구례로 내려갔다. 이듬해(1910)가 되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일파와 일진회가 누가 망국에 더 큰 공을 세우는지 서로 경쟁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쓴 황현의 소전(小傳)인
“난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 오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어 바람 앞의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세상이 이미 가라앉아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어렵구나(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난세의 두 처신.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이 어려운 사대부와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을 기회로 삼는 사대부로 나뉜다.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나서 자제들을 불렀다. 독이 퍼져 가는 몸으로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라고 말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이 나라가 망했다고 목숨을 버려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인조반정 이래 300년 가까이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당수 이완용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비서 이인직을 보내 망국 조건을 흥정하는 나라, 자신이 모셨던 황제의 지위를 국왕이 아니라 대공(大公)으로 해 달라고 흥정하던 나라에서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에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그러나 황현은 “내가 위로는 황천이 준 떳떳한 도리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일 읽었던 책도 저버리지 않고서 고요히 죽으면 진실로 통쾌하리니 너희는 크게 슬퍼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나라에서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이기에 선비는 망국 앞에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려온 아우 황원(黃瑗)에게 황현은 웃으면서 “죽기가 이리 쉽지 않은가. 독약을 마실 때 입에서 세 번이나 떼었으니 내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고 토로했다.
세 번이나 약사발을 뗄 정도로 생에 애착도 있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망국에 사대부가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성현의 글을 읽은 선비의 처신이었다.
1910년 8월 그렇게 황현은 세상을 떠났다. 약간 사시(斜視)이기에 그릇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그는
“금산(錦山) 군수 홍범식(洪範植),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晋), 승지 이만도(李晩燾), 진사 황현, 환관 반학영(潘學榮), 승지 이재윤(李載允)·송종규(宋鍾奎), 참판 송도순(宋道淳), 판서 김석진(金奭鎭), 정언 정재건(鄭在楗), 감역(監役) 김지수(金智洙), 의관(議官) 송익면(宋益勉), 영양(英陽) 유생 김도현(金道賢)…태인(泰仁) 유생 김천술(金天述)…연산(連山) 이학순(李學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