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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아파트 한 채 값 시계, 한국시장을 겨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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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올해 초 스위스에서 열린 바젤월드, SIHH(고급시계박람회)에서 앞다투어 선보였던 수억원대 시계가 속속 한국 시장을 찾고 있다.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의 손목시계들이 주목하는 고객은 한국의 남성들. 시계 칼럼니스트 정희경씨는 “여성이 명품 가방과 보석에 열광하는 만큼 이젠 남성들도 고급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남성 특유의 향수와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시계를 알아봤다.

글=서정민 기자

금속가루를 섞은 광택제와 대나무 막대기, 작은 붓을 이용해 시계 다이얼에 그림을 새기고 있는 일본의 옷칠 장인 키치로 마수무라.

지난 6월 9일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2층에선 스위스 시계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가 한국 소비자에게 ‘마스터 그랑 트래디션 그랑 컴플리케이션’을 소개하는 행사를 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12개의 별자리가 다이얼에 새겨진 이 시계의 가격은 4억7000만원이다.

5월 23일 서울 강남의 한 행사장에선 시계 브랜드 율리스 나르덴의 2011년 신제품 소개 행사가 열렸다. 율리스 나르덴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진 자사 제품 소개 행사다. 이날 가장 주목받은 제품은 미니트 리피터(minute repeater·분과 시를 각기 다른 소리로 알려서 시계를 보지 않고도 소리만으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한 장치) 기능을 장착한 시계 ‘알렉산더 대왕’ ‘서커스’ ‘대장장이’ ‘사파리’였다. 다이얼(시계 판)에 새겨진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의 시계들은 알렉산더 대왕 7억~10억원, 서커스 5억5500만원, 대장장이 3억9000만원, 사파리 4억8400만원이다. 각각 제작 개수가 30~50개밖에 안 되는 한정품이다.

율리스 나르덴 ‘서커스’. 일정한 시간이 되면 다이얼 위의 그림들이 움직이면서 소리를 낸다. ‘자케마르 리피터’라는 기능이다.

4월 8일부터 한 달간 롯데백화점 애비뉴엘과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전시됐던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은 보석 하나 사용하지 않은 제품이지만 가격은 10억원대다. “미니트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자동으로 날짜를 바꾸는 영구 캘린더), 문 페이즈(달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기능) 등 정교한 기능을 모두 장착할 수 있는 기술력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 기술”이라는 게 브랜드 홍보담당의 말이다.

율리스 나르덴을 수입하는 DKSH코리아의 브랜드 매니저 이현숙씨는 “이런 최고가 시계들이 한국 시장을 찾는 진짜 이유는 브랜드 이미지를 차별화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2층의 고급 시계 전문 매장에는 기본 가격대가 200만~300만원부터 시작되는 브랜드 20여 개가 입점해 있다. 루이뷔통·샤넬·디올·불가리 등 시계 전쟁에 뛰어든 패션 업체까지 포함하면 고급 시계 시장의 숫자는 더 늘어난다. 이렇듯 고급 시계 시장이 ‘춘추전국시대’이고 보니 업체들로서는 자사의 브랜드가 ‘고급 시계’로 인식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급 중에서도 고급’임을 강조해야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빈번해진 최고가 수입시계들의 한국 나들이는 이런 마케팅 전략 중 하나다.

분·시 다른 소리 내는 ‘미니트 리피터’ 인기

1 쇼파드 ‘우루시’. 일본 전통의 옻칠공법의 하나인 마키에 기법이 적용됐다. 2 오데마 피게 ‘밀리너리4101’. 타원형의 케이스부터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원이 각각 다른 공간에 떠 있는 3D 디자인이다. 3 루이뷔통 ‘땡부르 미니트 리피터’. 시계의 핵심인 무브먼트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다이얼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시계 칼럼니스트 정희경씨는 “남자들 사회에서 시계는 주요한 대화의 매개체”라며 “시계 제작에는 언제나 첨단 신기술이 적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소재, 신기술에 관심이 많은 남자들을 자극하는 데 시계가 좋은 대화 소재라는 것이다. 시계 매니어들은 기계식 손목시계를 ‘손목 위의 작은 우주’라고 말한다. 지름 40㎜ 내외의 작은 원안에 300여 개 이상의 정교한 부품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주목받는 기술은 ‘미니트 리피터’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투르비용(중력의 영향을 받아 시간 오차가 생기는 것을 최소화하는 기술)이 신기술의 최고봉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제 웬만한 고급 시계는 투르비용 기술을 기본적으로 적용한다. 반면 미니트 리피터는 눈으로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투르비용의 장점에 ‘소리’까지 더한 기술로 한 단계 앞선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게다가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지에 따라서도 등급은 달라진다. 파르미지아니의 10억원대 시계 ‘토릭 웨스트민스터’는 시계 안에 장착된 4개의 공이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소리를 재현한다.

보기만 하느냐, 듣기도 하느냐. 별것 아닌 차이 같지만 이 작은 차이는 남성의 향수와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로 충분하다. 움직이는 로봇은 다른 아이들도 갖고 있다. 그런데 내 것은 레이저 빔을 발사할 때 멋진 소리까지 난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하다.

일본 옻칠 장인이 새긴 용·호랑이 그림도

고급 시계들의 이미지 차별화 전략에는 ‘특별한 디자인’ 전략도 있다. 남과 다르게 보이려면 디자인이 먼저 눈에 띄어야 한다.

쇼파드가 올해 선보인 ‘우루시’는 일본에서 ‘살아 있는 국보’상을 수상한 장인 기치로 마수무라가 마키에(일본의 전통 옻칠 공예) 기법으로 다이얼에 그림을 새긴 시계다. 6.8㎜ 두께의 케이스에 동양의 상서로운 다섯 동물(용·불새·호랑이·현무·기린)을 각각 새기고 65시간 파워 리저브(동력 지속 시간)가 가능한 셀프 와인딩 무브먼트까지 장착했다. “동양 미술의 정교한 예술성과 스위스의 첨단 시계 기술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스켈레톤(시계 부품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 투명 케이스) 디자인도 남자들이 좋아하는 디자인이다. 특히 올해는 눈으로 보이는 부품들이 입체적으로 맞물린 3D 구조가 인기가 좋다. 오데마 피게의 ‘밀리너리4101’ 시계는 다이얼에서 보이는 3개의 크고 작은 원이 3개의 층으로 나뉘어 각각 공중에 떠 있다. 마치 SF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우주 정거장 같다.  

“여유있는 한국 남성, 중국관광객…고급 시계 관심 매우 크다”

제롬 램버트 ‘예거 르쿨트르’ CEO

시계 케이스가 회전하도록 만들어진 리베르소 시계. 서로 다르게 디자인된 두 개의 다이얼을 갖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의 ‘마스터 그랑 트래디션 그랑 컴플리케이션’의 소개행사장에서 제롬 램버트(43·사진)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전문경영인인 그는 2001년 최고경영자에 취임해 지금까지 브랜드를 지휘해 온 인물이다. 고급 시계 시장의 주요 고객으로 한국 남성을 주목하게 된 이유를 들어봤다.

-한국 시계시장은.

“최근 3~4년간 한국의 시계 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예거의 경우 매출액이 매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현재 예거 르쿨트르는 전 세계 50여 개국에 진출해 있는데 한국의 매출 규모는 20위 안에 든다.”

-폭발적인 성장의 배경은.

“한국 경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고급 시계에 대한 남자들의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관광객이 늘면서 한국의 면세 매출이 크게 성장한 것도 이유다. 더 이상 남성이 가족 부양의 책임 아래에서만 살던 시대가 아니다. 경제발전으로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남성들은 취미 활동뿐 아니라 패션·뷰티 등 다양한 기호를 누리고 싶어 한다. 남성을 상대로 한 모든 소비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예거 르쿨트르만의 특징은.

“178년의 역사를 가진 예거 르쿨트르는 시계의 핵심 부품인 무브먼트를 100% 직접 제작한다. 시계 제조 관련 특허만도 300개 이상을 가지고 있다.”

-2011년 신제품 중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제품은.

“올해는 리베르소(시계 케이스가 회전해서 앞뒤로 다른 디자인이 적용된 제품) 컬렉션이 탄생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그 기념으로 시계 뒷면에 원하는 이니셜이나 숫자, 또는 짧은 문장이나 그림을 새겨 넣어 자기만의 추억과 이야기를 담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고급 브랜드일수록 소규모의 VVIP 행사를 선호한다.

“일본을 비롯한 몇 개 국가에서 ‘마스터 클래스(직접 시계의 무브먼트를 조립하고 완성해 보는 클래스)’를 개최하고 있는데 향후 그 범위를 조금씩 더 늘려갈 계획이다.”

-CEO가 된 2001년과 현재의 시계 시장을 비교해 본다면.

“처음 최고영경자에 취임했을 때만 해도 고급 시계 시장은 소수의 국가에서 소수의 고객들만을 대상으로 했다. 또 여성 고객이 많았다. 10년 만에 이 모든 게 바뀌었다. 시계 시장은 앞으로도 큰 변화와 발전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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