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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손님에게 접대라니요?""아이가 왕따당해요"…탈북자 24시간 콜센터 사연들어보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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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3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서 북한이탈주민 전용 24시간 콜센터를 연 가운데 상담원들이 전화를 받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1.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한 엄마가 다급한 목소리로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24시간 콜센터(1577-6635)에 전화했다. 대전에 살고 있는 이 엄마는 지난해 2학기에 아들(12)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반 친구들이 “북한에서 온 애랑 놀지 말자”며 왕따를 시키고 “말투가 우리랑 다르다”며 배척한다고 했다. 탈북자 아이들만 다니는 대안학교로 전학시킬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남한에 정착한지 1년 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생활이 서툴 수밖에 없다. 아이까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니 속상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가 상처를 많이 받는데 참고 다니라고 할 수가 없다”며 “ 탈북 아이들이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2. “남한에선 손님 접대를 게을리하면 안된다고 하는데 북한에선 차 대접 문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 잊어버리고…. 이 문제로 소장과 하도 싸워서 이젠 도저히 회사를 못다니겠습니다.”

지난달 말 30대 초반의 한 여성 탈북자가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왔다. 이 여성은 서울의 한 개인 회계사무소에서 사무 보조를 한다. 그런데 차 심부름이 익숙하지 않아 소장과 갈등을 겪는다고 했다. 차를 내 가는 게 손에 익지 않아 실수가 잦고 자꾸 깜박한다는 것이다. 말 주변도 없어 인근 회계사무소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지 못해 소장의 면박만 늘어간다고 했다. 그는 이곳을 3개월밖에 다니지 않았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도 정부가 주는 취업장려금을 계속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3. 서울의 한 50대 여성이 울먹이며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왔다. 5년 전 함께 탈북한 남편의 폭력이 계속돼 1년 전 이혼했고 좋은 남한 사람을 만나 재혼하려고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전 남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죽여버린다”고 밤마다 협박을 한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이혼한 자신에게 행패를 부리면 처벌을 받는다고 누누이 이야기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 여성은 “북한 남성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데 남한에 와서도 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재혼해 남은 인생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탈북자 2만명 시대다. 2000년까지만 해도 300여 명에 불과했던 한 해 탈북자 수가 2009년부터는 3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10년간 10배가 됐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할 때 곧바로 도움을 청할 곳은 많지 않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탈북자 이웃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자본주의 물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도움을 받는데는 한계가 있다. 우울증을 겪거나 가정 내 불화, 부당 해고 등 말 못할 사연이 적지 않다.

탈북자의 정착을 돕기 위해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통일부 산하)이 지난달 말 24시간 콜센터를 열었다. 콜센터에 근무하는 전문상담사는 모두 8명(탈북자 출신 4명)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지혜(42·탈북 8년차)씨는 2년 전 통일부가 선발한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사 1기생이다. 그는 “최근에 한 탈북자가 병원 응급실에 갈 정도로 아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가족은 없고 119는 생각나지 않아 이 번호로 전화해왔다”며 “탈북자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1577-6635를 외우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상담 전화의 절반은 각종 지원제도와 주택 신청 절차 등에 관한 문의다. 취업 정보나 병원 안내ㆍ의료 혜택ㆍ학교 진학 문제에 대한 문의도 적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남한의 행정 업무 등에 관련된 질문도 받는다. 북한에서 간호전문학교를 나온 20대 여성은 남한에선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어떤 대학을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심지어 한 30대 여성은 가수의 꿈을 이루고 싶다며 기획사를 연결해달라고 했다. 야간에는 갑자기 아프거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담 전화가 많다.

이 재단 안효덕 생활안정부장은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오면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진 이들이 적지 않고 남한에 정착하는데 법률적인 문제가 많이 걸린다. 또 임금 체불이나 부당 해고를 많이 겪는다”라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24시간 콜센터는=시범 운영기간이던 4월 17일부터 5월 17일까지 한 달간 상담 건수가 638건에 달할 정도로 탈북자에겐 인기다. 정식 개소 첫날인 지난달 30일부터는 하루 평균 50여 건씩 전화가 걸려온다. 상담사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시간대별로 돌아가면서 근무한다. 오후 11시 이후에는 야근자 1명이 집에서 상담전화를 받는 재택근무시스템이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은 앞으로 상담 수요에 따라 상담사를 늘리고 의료ㆍ법률ㆍ노동 등 분야별 전문 상담사를 배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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