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국군 두 번씩 오간 ‘기막힌 인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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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호 01면

또다시 6월이다. 61년 전 이 땅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달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최원팔(83·사진)씨는 해마다 6월을 앓는다. 농사꾼이던 그는 3년의 전쟁 동안 인민군으로 두 번, 국군으로 두 번 복무했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데올로기는 그와는 상관 없다. 그저 살기 위해, 명령에 따라 총을 들었을 뿐이다. 육군 중사로 제대한 그는 애써 과거를 잊고 살았다. 열심히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 이른 요즘, 자꾸 악몽에 시달린다. 정신 없이 살던 젊은 시절에는 잊고 살던 지옥 같던 전쟁이 자꾸 되살아나는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허우적대다 잠을 깨면 아내가 걱정스럽게 내려다본다. 그는 자신이 싸웠던 전쟁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몸으로 경험했다. 그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 것이었는지를.

내가 겪은 6·25 <상> 육군 중사 출신 최원팔씨

중앙SUNDAY는 전쟁에 참여했던 국군과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지상중계한다. 대부분 팔순을 넘긴 그들의 인생에서 6·25는 무엇이었는지를 들었다. 사람들은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지만 6·25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6·25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하는 이유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38선 전역을 북한의 탱크가 밀고 내려왔다. 추풍령 아래 산골마을인 경북 금릉군 감천면(현재는 김천시) 양천동에 살던 최원팔에게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해 스물 두 살, 그는 부모와 아내, 막 태어난 아들, 세 남동생을 거느린 장남으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웃은 친척들이고 마을은 평화로웠다.

7월 중순에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피란민들이 마을로 몰려왔다. 원팔도 짐을 꾸렸다. 식구 모두 이부자리와 가재도구를 지고 길을 떠났다. 송아지도 한 마리 데려갔다. 남쪽으로 가다 어느 개울가에서 며칠 지냈다. 거기서 인민군을 처음 만났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걱정과 달리 인민군은 거칠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은 인민군사무소가 돼 있었고 청년들로 치안대가 조직돼 있었다. 원팔은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됐다. 입대 전날 원팔은 논으로 나갔다. 전쟁 전에 심은 벼가 뜨거운 태양 아래 잘 자라고 있었다. 그는 논에 물을 가득 가두고 고향을 떠났다.

훈련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인민군은 그를 실탄과 식량운반, 무기훈련을 담당하는 기간병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남쪽 출신이어서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9월 중순 인민군과 2인1조로 연락병이 돼 안동시 인민군 본부로 향했다.

안동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인민군 오토바이 부대가 떼를 지어 북쪽으로 달려갔다. 한눈에 봐도 패주하는 모습이었다. 9월 15일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28일 서울이 수복됐지만 원팔이 그런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동행한 인민군이 북으로 가자고 강권했다. 한참을 걷다 어느 마을 빈 집에서 쉬는데 오래된 뒤주가 눈에 띄었다. 열어보니 비단이 가득했다. 인민군은 고향으로 가져가겠다며 비단을 지게에 실었다. 문경까지 올라갔을 때 마음 굳게 먹고 말했다. “난 안 가겠다. 너 혼자 북으로 가라.” 인민군이 원팔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원팔도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둘은 노려보며 천천히 뒷걸음쳤다. 어느 정도 멀어지자 인민군은 비단을 진 채 북쪽으로 사라졌다. 원팔은 고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천으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인민군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북쪽으로 걸어갔다. 인민군복을 입은 원팔을 볼 때마다 “동무는 어디메요(소속이 어디요)?”하고 물었다. 민가로 들어가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첫 번째 인민군 복무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김천에 오니 미군 트럭들이 도로 가득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팔은 차량 행렬의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을 가두어 두었던 논엔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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