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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서희의 ‘지젤’에 뉴욕이 홀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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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젤(서희여)이 윌리(결혼 전에 죽은 처녀 귀신)가 된 뒤 생전에 사랑했던 연인 알브레히트(데이비드 홀버그남)와 사랑의 춤을 추는 장면. [사진=아메리칸발레시어터]


두 시간의 공연을 마친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객석에선 환호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대여섯 차례의 커튼콜이 이어졌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세계 3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발레리나 서희(25)가 1일(현지시간)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 섰다. 이날 공연된 발레 ‘지젤’의 여주인공으로서 첫 데뷔였다.

 그는 6년 전 ABT에 입단할 때부터 지젤을 꿈꿨다. 4년 전부터는 ‘코르드발레(군무단원)’의 일원으로 지젤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동작 없이 왕비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시녀부터 군무까지 주인공을 빼곤 안 해본 역할이 없다”고 말했다.

동양인이면서도 작지 않은 키(168㎝)에 선이 아름다운 그의 연기는 뉴욕 발레가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코르드발레로선 이례적으로 2009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지난해엔 코르드발레보다 한 단계 위인 ‘솔로이스트’로 승격됐다.

 그런데 새옹지마였다. ‘호두까기 인형’에 출연하려던 그는 연습하다 발목 인대를 다쳤다. 6개월 동안 발레를 접고 재활치료에 매달려야 했다. 자신과의 싸움이었지만 그는 “나를 믿었다”고 말했다. 재활 도중 꿈에도 그리던 지젤 역에 발탁됐다. 연습시간은 한 달밖에 안 됐다. 그는 지난 4년 동안의 경험을 떠올렸다. 비록 연습을 많이 하진 못 했지만 누구보다 지젤에 대한 이해는 깊다고 자신했다.

 지젤은 ‘발레의 햄릿’으로 불리는 낭만 발레의 대표작이다. 1막과 2막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1막에선 신분을 감춘 귀족 청년과 꿈 같은 사랑을 나누다 연인의 배신에 미쳐버리고 결국 심장이 터져 죽는 비련의 여인을 그려야 한다. 이와 달리 2막에선 연인과 느낌만으로 교감해야 하는 윌리(결혼 전날 죽은 처녀 귀신)로 변신한다. 테크닉은 물론 주인공의 깊은 내면까지 드러낼 수 있는 연기력을 요구한다. 지젤 역이 발레리나의 로망으로 꼽히는 이유다.

 그는 “처음 무대에 섰을 땐 살짝 흥분 됐다”고 말했다. 지젤을 의식하기보다 상대역과 자연스러운 교감을 살려나갔다. 그는 “가장 신경 쓴 부분도 2막 첫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산 사람으로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1막에서 윌리가 돼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2막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이날 객석에서 가장 많은 박수가 터져 나온 것도 이 장면이었다.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변신했던 그는 막상 현실에선 털털한 20대로 돌아왔다. 13년 동안 외국에서 혼자 살았지만 “아직도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제일 맛있다”고 했다. 그는 새 도전을 꿈꾸고 있다. ‘백조의 호수’ 여주인공이다. 그는 “발레리나는 춤만 춘다고 생각하지만 오해”라며 “캐릭터를 100% 이해하고 연기를 하자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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