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월간중앙] 대입 수석 합격자 23인의 인생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예비고사 혹은 학력고사 수석 합격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석 합격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현재 그들은 부정한 사회를 밝히는 법관, 선진 한국을 이끌어 나가는 과학자들이 되어 있을까. 살아가는 동안 전국 수석이라는 경력은 그들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존심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에 그러한 경력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대학입학시험 합격의 기쁨과 탈락의 절망감이 교차하는 2월, 1971년부터 1990년까지의 대학입학시험 수석 합격자 23명이 말하는 ‘수석 인생’스토리를 듣는다.

몇년 전 한 방송사에서 ‘그 사람 그 후’라는 TV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과거 뉴스의 초점이었던 인물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시청자들은 어렴풋한 기억 속의 인물들을 더러는 흐뭇한 마음으로, 또 더러는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온 가족이 모이는 저녁시간대에 방영하던 그 프로를 보면서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인생유전이니, 인간지사 새옹지마니 하는 말들을 하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들은 새싹들이다’로 제1회 MBC 창작동요제 대상을 차지했던 이수지씨는 어느덧 명문 여대에서 영어를 전공하는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었고, 집이 가난해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던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씨는 꽤 잘 나가는 보험설계사가 되어 있었다. 앙상한 몸으로 전국민의 눈물샘을 터뜨렸던 임씨는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그래서 돈을 벌면 우유도 마시고 싶다고 했다는 과거의 보도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말많은 세상,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사람 사는 이야기 가운데서도 과거 뉴스의 초점이었던 이른바 ‘화제의 인물’들이 오늘날 어떻게 사는지 몰래 엿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학력고사 혹은 예비고사에서 전국 수석의 영광을 안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12월말, 혹은 1월초 신문의 사회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며 모든 수험생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그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인터뷰에서 약속이나 한 듯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현재 부정한 사회를 밝히는 법관,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법학자, 선진 한국을 이끌어 나가는 과학자들이 되어 있을까.

학력고사 혹은 예비고사 전국 수석 합격자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예상했던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71년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부터 1990년 학력고사 수석 합격자까지 20년간의 수석 합격자들을 찾기 위해 지난 20년 동안의 12월과 1월분 신문을 샅샅이 뒤졌다. 1990년대 학력고사나 수능 수석 합격자들은 취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올해 30세 이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수석 합격자들만 취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과거 신문기사를 통해 1차적으로 수석 합격자들의 명단과 지망 대학 학과, 출신고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연락처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서울대학교 총동문회(전국 수석 합격자들은 한명도 예외없이 서울대로 진학했다)
와 과별 동문회, 각 출신 고등학교와 고교 총동문회 등에 연락해 반 정도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디에도 연락처가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과거 수석 합격 인터뷰 기사에 난 부모의 이름을 확인하고 수석합격자 아버지의 당시 직장을 수소문해 연락처를 알아내기도 했다. 한명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30통 넘게 전화를 한 경우도 있다.

20년간 수석 합격자는 모두 23명이었다. 햇수보다 수석 합격자의 수가 더 많은 이유는 공동합격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과 86년, 88년 세 해였다. 1979학년도 예비고사에서는 누가 수석합격을 차지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수석 합격자 23명이 선택한 학과는 법학과, 경제학과, 국사학과, 불문학과, 물리학과, 전자공학과, 의예과, 전산학과, 화학공학과 등으로 다양했다. 그 가운데서 법학과로 진학한 경우가 6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경제학과 5명, 물리학과 4명, 전자공학과 3명 순이었고, 나머지 학과에 각각 1명씩 진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이전에는 문과에서 전체 수석이 나온 경우가 많았으나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이과에서 전체 수석이 나왔다는 것도 한가지 특징이었다. 수석 합격자들은 대체로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인생을 평탄하게 살았다는 것은 수석 합격자들이 인터뷰에서 희망한 대로 현재 법조인, 학자, 또는 연구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간혹 짧지만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삶을 살아온 수석 합격자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82학년도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원희룡(元喜龍·36·변호사)
씨의 경우다.

원희룡. 그의 이름은 제주도민들에게는 하나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적어도 19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그는 하나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원변호사는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수석 합격의 소감을 묻는 물음에 “나의 영광이기에 앞서 제주의 자랑”이라고 소감을 밝혀 그 자신이 제주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밝힌 바 있다.

원희룡, 제주도민의 전설

사실 원변호사는 당시 제주도에서 소문난 수재였으며 그 주변에서는 은근히 그의 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의 수석 합격 덕분에 제주 제일고등학교는 그 이름을 전국에 떨칠 수 있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제주 지역 최고 명문인 오현고등학교는 지금까지 한번도 전국 수석을 내지 못해 전통의 라이벌 제주일고에 대해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19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원변호사의 고교 후배 강봉진(서울 현대중앙병원 의사)
씨는 그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수업시간에 원선배는 교실 맨 뒤쪽에 앉아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 놓고 무엇인가 자기만의 공부를 하곤 했답니다. 그러다 가끔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수업을 하던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 내용 중 뭔가 틀린 부분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당황해 하셨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는 주위의 기대대로 학력고사에서 332점(340점 만점)
을 획득해 전국 수석의 영예를 안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착실하게 공부해 재학중 사법시험에 합격해 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의 대학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과 복학,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면서 10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이름은 차츰 제주도민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그의 고교 후배들을 중심으로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소문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우선 그가 서울대에서 제적당한 후 지방의 한 신학대학에 들어갔다는 ‘설’이 있었다. 원변호사의 부친이 교회 장로였기 때문에 그 소문은 상당히 그럴 듯한 ‘팩트’(fact)
로 인정받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그가 학생운동을 하다 모 기관에 연행되어 매를 맞고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거리를 배회하는 남루한 옷차림의 그를 봤다는 목격자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치 못할 소문들이지만 잊혀져 가는 자신들의 ‘스타’를 그리워하는 제주도민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그런 소문들을 뒤로 한 채 차츰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원변호사가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으로 합격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던 1992년 어느날, 그를 제주도민들의 전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가 제34회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했다는 기사가 모든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했던 것이다. 휴학과 복학을 거듭한 그의 학생운동 경력을 자세히 다루고, 남들이 사법시험 준비서들을 한번 완독할 정도의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공부해 수석의 영예를 안았다는 얘기도 썼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역시 원희룡’임을 연발하며 그의 천재성을 다투어 칭송했다.

특히 진보신문임을 자처하는 “한겨레신문”에서는 운동권 출신의 사시 수석 합격을 타 신문들보다 크게 보도했다. 그러면서 그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 소감을 실었다.

학력고사 수석 합격에 이은 사법시험 수석

그러나 그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검찰로 갔다. 그후 서울지방검찰청,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등을 거쳐 1998년 9월 ‘변호사 원희룡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그리고 1999년 1월 현재의 법무법인 ‘춘추’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현재 지적재산권 분야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시험 수석이라는 젊고 화려한 경력의 그를 정치권에서 가만히 놔둘 리 없다. 늘 386세대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그의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영입경쟁이 이어졌고 마침내 지난 1월13일 오세훈 변호사 등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사실 그가 올봄 총선에 출마할 경우 제주 지역의 선거 판세는 크게 바뀔 것이라는 분석이 오래 전부터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었다. 그가 어디를 지역구로 선택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대입 수석 합격자들 가운데 법학과를 지원한 여섯명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사법시험을 패스했다. 1973년도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 허익렬씨는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현재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가 주로 담당하는 분야는 국제 금융 관련 업무.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석사)
을 졸업했다.

1980년도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 김기영씨는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부산 해동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도 현재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최초로 학력고사가 실시된 1981년도(1981년을 최초로 학력고사가 실시된 해라고 하는 이유는 나중에 설명한다)
에 전국 수석을 차지한 오관석씨는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81년에 입학해 83년에 사법시험을 패스했으니 그는 대학 입학 3년만에 청운의 꿈을 이룬 셈이다. 그는 서울대를 수석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수석 졸업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부산진고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석사)
을 졸업했다.

법학과 출신 수석 합격자 6명 가운데 3명의 현재 근무처가 김&장 법률사무소였다. 이런 경력의 변호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 최대 로펌 김&장의 자존심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장의 박병무 변호사는 예비고사 수석은 아니었지만 서울대 본고사에서 수석을 차지한 데 이어 수석 졸업의 영예를 차지한 주인공이다.

해마다 바뀌는 대학입학시험 제도

1980년까지 존재하던 예비고사 제도는 1981년부터 학력고사 제도로 바뀌게 된다. 학력고사 수석 합격은 곧 서울대 수석 합격과 동의어였지만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가 반드시 서울대에 수석 합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예비고사 성적은 대학별 본고사 전형에 30%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수석 합격자를 취재대상으로 하지 않고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들을 취재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일개 대학(아무리 서울대라 하더라도)
의 수석이 아니라 ‘전국 수석’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 제도처럼 자주 바뀐 제도도 없다. ‘교육백년지대계’(敎育百年之大計)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입 제도는 전국이 떠들썩하게 새로 제정되었다가는 어느 해 갑자기 바뀌곤 했던 것이다. 각 일선 고등학교의 입시 지도 담당 교사들은 물론 교육부 입시 담당 관계자들도 그 변천과정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서 대학입시 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대학입시 제도사(史)
는 크게 네 단계로 구분된다. 1960년대까지 시행되던 대학별 단독시험제는 1969년 예비고사제로 교체된다.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대학별 본고사를 병행하던 예비고사 제도는 1980년까지 12년 동안 비교적 ‘장수’한 제도였다. 이때는 주로 예비고사 성적을 대학별 전형에 30% 반영했다. 본고사는 대학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주로 국어·영어·수학 시험을 치렀다.

1981년부터는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를 실시했다. 1981년까지 명칭은 그대로 예비고사였으나 81년부터 본고사가 폐지돼 그해 입시제도의 성격은 학력고사에 더 가까웠다. ‘선시험 후지원 제도’가 ‘선지원 후시험 제도’로 바뀌는 등 세부 내용이 변하기는 했지만 학력고사는 1993년까지 지속된다.

1994년부터는 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되고 있다. 현재 수능은 대학별 논술과 함께 실시돼 논술이 당락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으며 논술고사 덕분에 각 대학의 국어 전공자들 가운데서는 잘 나가는 논술강사가 상당수 배출되기도 했다.

1982년 명칭상 최초로 실시된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앞에서 소개한 원희룡 변호사다.

1983년도 전국 수석 홍승면씨는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서울 고려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현재 수원지방법원 판사이자 법원행정처 인사 제3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홍판사는 학력고사 사상 최고점으로 합격한 경력의 소유자다. 340점 만점이던 학력고사에서 그는 영어에서 단 한 문제만 틀려 339점이라는 경이로운 점수를 받았다. 그는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담임도 영어 선생님이고 아버지도 영어 선생님인데 영어에서 한 문제를 틀려 죄송할 따름’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1984년도 전국 수석 장순욱씨는 1993년 제3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구 영신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현재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 판사로 재직중이다. 20년간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석 합격자 23명 가운데 경제학과를 지망한 사람은 모두 5명이다. 1974년도 예비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오내원 씨는 한국농촌경제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광주 제일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예비고사가 실시된 후 지방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국 수석 합격의 기쁨을 안았다. 부친 오시록씨가 당시 광주일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서 수석의 기쁨은 두배로 컸다고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밝혔다.

1978년도 예비고사에서 수석 합격한 박석원씨는 서울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82년 금성사(현 LG전자)
에 입사해 현재 LG전자 시카고 지사에서 LGEUS H/A(Home Appliances)
담당 상무보로 근무하고 있다.

1984년도 학력고사 전국 수석 황덕순씨는 현재 노동연구원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서울 경성고와 서울대 경제학과(경제학 박사)
를 졸업했다.

1986년도 학력고사 전국 수석 오석태씨는 현재 시티은행 이코노미스트로 재직중이다. 서울 숭실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부모님이 법학과를 지망할 것을 권유했으나 경제학과에 지원한 소신파였다. 1990년도 학력고사에서 수석 합격한 양진호씨도 대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학력고사 수석 합격은 이미 예견했던 일

물리학과를 지원한 수석 합격자는 모두 4명이었다. 1970년 예비고사에서 수석 합격한 오세정씨는 경기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표면물리, 반도체 및 지성체가 그의 주된 연구 분야이며 1998년에는 한국과학재단이 주는 제6회 한국과학상을 받기도 했다.

1984년 학력고사 전체 수석 이미령씨는 서울 미림여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자연계 여학생으로는 학력고사 사상 처음으로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이씨는 그해 실시된 전국 모의고사에서 줄곧 자연계 수석을 차지해 학교에서는 은근히 그의 학력고사 수석을 기대했다. 사립 미림여고의 한 교사는 1979년 학교 설립 이후 82년 1회 졸업생 김은주(서울대 의대 졸업)
씨가 여자 자연계 수석을 차지한 데 이어 84년 전국 수석을 내 학교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당시 이씨의 학급 담임이었던 송건수 미림여고 교사는 현재 이씨가 미국 유학중이라고 말했다.

1986학년도 학력고사 전체 수석 이준걸씨는 서울 경성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도 현재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유학중이다. 1988년도 수석 정성태씨도 부산 충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전자공학과를 지원한 수석 합격자는 모두 3명이다. 1972년 예비고사에서 수석 합격한 한태숙씨는 서울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그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전산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공학부 전자전산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7년 학력고사 수석 김영룡씨는 부산 동래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김씨의 학력고사 수석은 1898년 개교한 동래고가 개교 90여년만에 처음 맞는 경사였다고 교사들은 당시를 회상한다. 김씨는 현재 미국 텍사스에서 유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학력고사 수석 이일완씨는 서울 서초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공학박사)
를 졸업했다. 이씨는 중학교 시절부터 줄곧 상위권은 유지해 왔으나 수석은 계속하지 못해 수재형이라기보다 노력형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학창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현재 대우전자연구소에서 디지털TV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 외에도 1975년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 송기호 씨는 대전고, 서울대 국사학과(박사)
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국 수석 합격자가 국사학과로 진학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976년 예비고사 수석 합격자 임희근씨는 경기여고와 서울대 불문학과, 프랑스 파리제3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한울출판사 이사로 재직중이다.

1977년 예비고사 수석 신상훈씨는 보성고 졸업 후 서울대 의대로 진학했고, 1989년 학력고사 수석 이종진씨는 서울 대신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화공과로 진학했다.

1971년부터 1990년까지 20년 동안 여성 수석 합격자는 단 2명 뿐이었다. 그 주인공들은 1976년 예비고사에서 수석 합격한 임희근씨와 1985년 학력고사에서 수석합격한 이미령씨다.

20년간 여성 수석 합격자는 2명 뿐

여성 수석 합격자들을 찾아내는 것은 남성 수석 합격자들을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이들은 서울대 총동문회나 고등학교 총동문회측에도 전혀 연락처를 남겨두지 않았다.

이미령씨 출신고인 미림여고에서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교사들이 많았다. 특히 이씨의 고3 담임이었던 송건수 교사는 여전히 미림여고에 근무하고 있었다. 송교사는 “이씨가 줄곧 전국 모의고사에서 자연계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성적이 매우 우수해 은근히 전국 수석을 기대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또 당시 이씨의 지능지수가 152로 수재형이었다고 말했다.

임희근씨와는 수소문 끝에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우선 당시 수석 합격 인터뷰 기사를 통해 부친이 언론인이자 전 청와대 대변인인 임방현씨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관훈클럽을 통해 임방현씨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임희근씨가 현재 한울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임씨는 경희초등학교와 혜원여중, 경기여고를 다니는 12년 동안 결석, 지각, 조퇴 한번 없이 줄곧 수석을 차지한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그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제3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귀국 후 계속 출판업계에 종사하다 현재 한울출판사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수석 합격자들 가운데는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난과 열악한 학습환경 속에서 나온 전국 수석이라는 기쁨은 사회적 지위가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부모 밑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차지한 수석보다 훨씬 크고 값진 것이었다. 그들의 수석 합격 기사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기도 했다.

1975년 수석 송기호 교수는 두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조양임씨와 여동생 영희씨가 공장에서 버는 월 2만5,000원으로 어려운 셋방살이를 했지만 당당히 전국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수석 소감을 묻는 질문에 “기쁘다. 만점 가까이 시험을 잘 치렀기 때문에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1981년 수석 합격자 오관석 변호사는 당시 기사에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뒷바라지해 준 홀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감사드린다”고 수석 합격의 영광을 홀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돌렸다. 제주가 고향인 오변호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공무원이던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던 부산으로 이사해 살았다. 오변호사의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1984년 수석인 노동연구원 황덕순 박사는 “홀어머님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은 장학생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 이를 악물고 곰처럼 공부했다”고 말해 장학생이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당당히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황박사 가족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김병상씨가 한 대학의 잡역부로 일하며 어렵게 모은 월 25만원의 수입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김씨는 “남들처럼 잘 먹이고 입히지 못해 늘 가슴아팠는데 아들이 수석 합격해 너무 자랑스럽고 기쁘다”며 눈물을 흘렸다.

“수석 합격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곰처럼 공부했다”

1988년 수석 정성태씨는 “이 영광을 고무신 공장 여공으로 뒷바라지해 주신 홀어머니께 바친다”고 수석 합격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때 가장을 잃은 정씨 가족은 어머니 안옥순씨와 누나가 집 근처 고무신 공장에서 미싱공으로 근무하며 받는 봉급 33만1,000원으로 가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1988년 재수 끝에 수석 합격의 영광을 안은 이종진씨는 “모든 영광을 파출부 일을 하며 어렵게 뒷바라지해준 어머님께 돌리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86년 화물트럭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쳐 몸져 누운 뒤 가족의 생계와 세 자녀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온갖 궂은 일을 쫓아다니며 파출부 생활을 해온 각고의 세월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수석 합격자들 중 유독 장남이나 장녀가 많은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20년간 수석 합격자 23명 가운데 14명이 맏이였다.

1972년 수석 한태숙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한석환(당시 한국은행 국고부장)
씨의 6남매 중 장남이다. 1974년 수석 오내원 한국농촌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오시록(당시 광주제일고 교사)
씨의 3남매 중 장남이고, 1975년 수석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조양임씨의 1남1녀 중 장남이다.

1976년 수석 임희근 한울출판사 이사는 임방현(당시 청와대 대변인)
씨의 2남2녀 중 장녀이며, 1980년 수석 김기영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도 김준상(당시 부산진구청장)
씨의 3남 중 장남이었다. 1983년 수석 홍승면 법원행정처 인사제3담당관은 홍창선(당시 서울 종암중 교사)
씨의 2남1녀 중 장남이다.

1984년 수석 장순욱 포항지원 판사는 장영호(당시 대구 성광중 교사)
씨의 1남2녀 중 장남이고, 1984년 수석 송병호씨도 송재옥(당시 교사)
씨의 2남1녀 중 장남이다. 유이(唯二)
한 여자 수석 중 하나인 이미령씨는 이창호(당시 흥진금속주식회사 대표)
씨의 1남1녀 중 맏이다.

1986년 수석 오석태 시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오경락(당시 청와대 정무제2비서관)
씨의 1남1녀 중 장남이고, 1987년 수석 김영룡씨는 김성진(당시 약사)
씨의 2남1녀 중 장남이다. 1988년 수석 이일완 대우전자연구소 연구원도 이정대(당시 공인회계사)
씨의 3남 중 장남이고, 1989년 수석 이종진씨는 이송헌씨의 2남1녀 중 장남이며 1990년 수석 양진호씨도 양재원씨의 2남 중 장남이다. 수석 합격자라는 꼬리표는 영광이라는 이름으로든 부담이라는 이름으로든 평생 수석 합격자들을 따라 다닌다. 1년에 오직 한 명, 많아야 두 명 정도가 얻을 수 있는 대입 전국 수석이라는 경력이 수석 합격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학력고사 수석,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존심

대부분의 수석 합격자들은 전국 수석이라는 경력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존심임과 동시에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수석 합격이 부담이 되는 이유는 늘 따라다니는 주변 사람들의 약간은 과도한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수석 입학하고 졸업 또한 수석으로 한 오관석 변호사는 “법조계라는 폐쇄성 짙은 사회 내에서는 누가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속속들이 다 알 수밖에 없다”며 “그런 까닭으로 학력고사 전체 수석합격이라는 경력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주는 동시에 부담이 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덧붙였다.

임희근 한울출판사 이사도 스스로에 대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밝히고, “전국 수석이 메리트가 되면서도 동시에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특성상 전국 수석이 대중의 큰 가십거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고 실력자라는 자부심과 ‘수석 합격자들은 무엇인가 다를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감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들 삶을 개척해 나가는 데 플러스 요인이 된 것은 아닐까. 대입 수석 합격자들이 모두 그들 나름대로 사회의 인정을 받으면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2010년쯤 이들은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들을 하고 있을까. 다시 한번 같은 제목의 기사를 쓰고 싶다. 그때는 1990년대 대입 수석 합격자들 10인의 ‘성공’ 스토리를 독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원섭 월간중앙 기자 <hyunn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