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5월의 밤, 제주도에서 듣는 세시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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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현 기자

14일 밤 제주엔 바람이 잔잔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윤형주(64)가 문득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굿 나잇 레이디스, 레이디스 굿 나잇….’ 특유의 매끄러운 목소리로 팝송 ‘굿 나잇 레이디스(Good night, Ladies)’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외 테이블에 있던 김세환(63)이 담요를 두른 채 피아노 옆으로 걸어왔다. 송창식(64)은 자리에 앉은 채 카랑카랑한 소리를 보탰다. ‘트윈 폴리오’의 원년 멤버 이익균(64)의 묵직한 베이스도 함께였다. 포개지는 ‘세시봉 친구들’의 화음. 저녁 테이블에서 불현듯 시작된 즉석 콘서트는 어느덧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5월 제주였다.

 40년 전 서울 무교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의 풍경이 꼭 이랬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한 사람이 노래를 하면, 또 다른 이가 소리를 보태며 노래를 이었다. 불과 1시간 전 1800여 객석이 빼곡히 들어찬 가운데 공식 제주 콘서트를 마친 뒤였다. 2월부터 시작된 전국 투어 콘서트의 열세 번째 무대였다. 세 시간 가까이 마흔 곡을 소화하고도 여전히 노래가 즐거운 이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펼쳐졌던 즉석 공연은 세시봉 3총사의 음악 인생을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지난해 9월부터 불기 시작한 세시봉 열풍은 계절이 두 번 바뀌고도 식을 줄 모른다. 아니, 오히려 그 열기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특히 중년들이 지갑을 열면서 대중음악 산업에 미친 영향이 작지 않다. 매주 펼쳐지는 이들의 투어 콘서트는 중년의 관객들로 빼곡하다. 음반 매장마다 추억의 포크송·올드팝 음반 판매량이 30~40%씩 늘었다. 통기타 판매량도 지난해 대비 50%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윤형주는 “세시봉 열풍을 보면서 우리 중·장년 세대가 그 동안 많이 외로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10대들의 노래에 둘러싸여서 들을 음악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진단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세시봉의 음악은 노랫말이 먼저 들어오는 음악이다. 시를 닮은 노랫말이 추억과 인간애를 자극한다. ‘사랑의 비가 내리네 두 눈을 꼭 감아도 귀를 감아도….’ (윤형주, 어제 내린 비)’

 이런 노랫말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매만진다. 최근 세시봉 열풍에 중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까지 열광했던 건 그래서다. 그들의 음악에서 요즘 아이돌 음악의 차가운 자본 논리 대신, 인간의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제주에선 사람을 어루만지는 인간의 노래가 들렸다.

제주=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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