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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방송 현대화의 출발점, 일제 땐 총독부 자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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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29면

서울 남산 위에는 서울의 랜드마크 N서울타워가 서 있다. 서울의 중심부 가장 높은 전망대로 맑은 날에는 개성이 보이는 관광 명소다. N서울타워는 1969년 TV와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지금도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과 여러 케이블TV, FM 송신 안테나가 설치돼 전국 시청자의 절반가량이 N서울타워 전파탑을 통해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61>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KBS 옛 청사)

남산은 방송과 인연이 깊다. KBS는 76년 여의도 새 사옥으로 이사할 때까지 남산에 있었다. 퇴계로 세종호텔 건너편으로 남산에 오르자면 대한적십자사를 지나 왼편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다. 이 알록달록한 청색 건물이 KBS 옛 사옥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로보카 폴리 구조 대작전’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는 이곳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로봇으로 변신이 가능한 자동차들의 구조 이야기 ‘로보카 폴리’는 올해 2월 말부터 한국교육방송(EBS)에서 인기리에 방영하는 국산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1987년 방우회에서 세운 첫 방송 터(덕수초교 교정) 유허비 앞에 선 정홍택 교수 신동연 기자

의열단 김익성 의사, 총독에 폭탄 투척
꽃이 진 자리에 신록이 우거져가는 싱그러운 봄날, 해맑은 아이들이 상상력을 키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이곳에선 평화가 넘쳐났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 저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분명 복되고 아름다울 터이다.

그러나 100년 전, 이 나라 이 터전은 그늘이 깊었다. 1906년 이곳에 일본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을 쳤던 ‘왜성대(倭城臺)’라는 이름이 되살아났다. 한·일 강제병합 후에 통감부에서 총독부로 간판을 바꾸었는데, 총독부는 1926년 광화문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표석만 남아서 국치의 쓰라림을 일깨워주고 있다. 애니메이션센터 정문 오른쪽에는 1921년 의열단 김익상 의사가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곳이라는 표석도 있다. 그런데 KBS가 있었던 곳이라는 표석은 없어서 젊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현대식 방송시설로 남산시대가 열렸고 서울의 새 명소가 되었습니다. 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는 KBS라디오(국내)와 국제방송국(대북·대외)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 ‘산길다방’이 있었는데 아마 60∼7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던 다방일 겁니다. 방송국 직원들은 물론 연예인이나 작곡가, 작가들이 꽉 들어찼으니까요. 밤에는 데이트하는 남녀들이 즐겨 찾았고요. ‘계란 반숙’과 ‘위티’가 인기 메뉴였는데 위티는 홍차에 위스키를 두어 방울 떨어뜨린 것이지요. 그 명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유감입니다.”

한국일보 출신 연예기자 1호 정홍택(75) 단국대 초빙교수는 당시 방송국 사람과 연예인들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풀어놓았다.

리라초등학교와 숭의여자대학교 언덕배기에서 옛 방송국 자리를 보며 한국방송 80여 년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방송(Broadcast)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다. 해군에서 각 함정 앞으로 동일한 전보를 개별적으로 보내지 않고 한꺼번에 전송하는 것을 일컬었다. 라디오 방송은 미국이 1920년에 첫 방송을 했다. 프랑스, 영국, 독일이 뒤를 이었고 일본은 1925년에 방송국을 개국했다.

라디오는 무선과학의 아버지 영국의 맥스웰, 이름이 주파수 단위가 된 독일의 헤르츠, 코일을 발명한 프랑스의 프랜리, 안테나를 발명한 러시아 포포프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결합해 만든 작품이다.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정동 1번지에서 경성방송국(JODK) 정규방송 첫 전파가 발사됐다. 당시 라디오 수신기는 부의 상징이었다. 전국에 5000대쯤 등록돼 있었고 대부분 일본인들이 갖고 있었다. 조선인 소유는 1000대가 채 되지 않았다. 확성기 달린 라디오 가격이 50원이나 됐기 때문이다. 당시 회사원의 평균 월급이 30원밖에 안 돼 여간해선 장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지와 소모비로 월 2원, 청취료로 월 2원을 추가해야 했다.

“삼한사온의 그 사온, 바람 없고 따뜻한 날, 남향한 대청에는 햇빛도 잘 들고, 그곳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귀돌어멈과 할멈이, 각기 자기들의 일거리를 가지고 앉아 육십팔원짜리 ‘콘써톤’으로 ‘쩨.오.띠.케(JODK)’의 주간 방송, 고담이라든가 그러한 것을 흥미 깊게 듣고 있는 풍경은, 말하자면 평화 그 물건이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

이것은 1938년 경성 한약국집의 풍경이다. 이때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이중방송을 해서 해마다 1만 대씩 라디오가 늘어가던 때였다. 일본어 방송을 제1방송, 한국어 방송을 제2방송으로 불렀다. 이중방송이 실시된 1933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성방송은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국어 강좌 시간은 물론 국악과 동화, 역사이야기까지 있어서 방송이 한민족의 얼과 긍지를 일깨웠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상 단속이 강화되고 한국어 방송에도 가혹한 제약이 가해졌다. 그해 말 수신기 보급 대수는 27만1994대나 된다.

소련군 진주, 북으로 가는 방송 끊어
그 무렵 일제 총독부는 방송전파 관제를 실시하고 일반 청취자들의 단파수신기와 외국인 신부·목사들이 가지고 있던 고급 수신기를 압수한다. 해외 방송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단파는 파장이 멀리 간다. 1942년 12월 세밑, 단파수신 사건이 터진다. 경성방송 한국인 기술자들이 단파 수신기를 조립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중국 중경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우리말 방송을 몰래 듣는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의 육성으로 ‘고국 동포에게 고함’을 들은 사람들은 ‘일본은 패전국이 될 것이며 조선은 해방된다’는 내용을 암암리에 퍼뜨렸다. 이 사건으로 300여 명이 체포되고 7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퇴직 방송인들의 친목모임인 방우회 회원들은 1991년, 여의도 KBS 안에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기념하는 물망비(勿忘碑)를 세우고 해마다 현장을 찾아 기린다. 그들은 우리나라 방송의 발상지인 정동 경성방송국 자리(덕수초등학교 교정)에는 첫 방송 터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도쿄방송국(JOAK)을 통해 일왕의 항복 담화가 방송되었다. 경성방송국은 이것을 동시 중계했다. 12시 정각에 “기립!”이라는 외침과 함께 모두가 일어서서 일왕의 방송을 들었다. 일본인 직원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 같았고 여자 아나운서가 훌쩍거렸다. 하지만 일본군이 지키던 방송국에서 제1방송은 여전히 일본어 방송이 차지했다. 8월 20일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했다. 그들은 24일 한반도 내 전국방송국을 연결하고 있던 방송전용노선을 38선에서 절단했다. 이때부터 이북 방송국들은 경성방송국이 편성한 방송을 중계할 수 없게 되었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9월 9일 경성방송국에 도착한 뒤에야 그때까지 주둔하던 일본군이 철수했다. 오후 5시, 시보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일본어 뉴스를 끄고 우리말 뉴스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국어 방송이 제1방송 지위를 찾은 것이다.

경성방송국은 KBS 중앙방송국으로 바뀌어 한국전쟁으로 폭파될 때까지 정동에 있었다. 부산 전시방송 시절을 거쳐 정동으로 다시 돌아와 임시방송시설로 급조해 쓰다 57년 12월 10일 남산시대를 연다.
61년 5월 16일 새벽 4시 5분, 남산 KBS 직원들 앞에 군인들이 총을 쏘며 들이닥쳤다. 직원들은 담을 넘어 도주하거나 책상 밑에 숨었다. “안심하라. 우리는 혁명군이다.” 무장군인들은 급박하게 아나운서를 찾았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불려 나왔다. 한 장군이 다가와 협조를 요구했다. 박정희 소장이었다. 5시 정각에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전문에 이어 혁명공약이 낭독되었다. 혁명세력에게 방송 장악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지금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건물 외벽에는 ‘국토통일(國土統一)’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그 휘호를 쓰면서 박 대통령은 그날 새벽 방송국에 진입하던 극적인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높은 담에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이 자리는 9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지원기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자리 잡으면서 열린 문화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울의 중심 남산, 유행의 중심 명동과 가까운 지리적 장점도 있지요. 우리 문화 콘텐트 산업의 발전과 육성을 위해 다양한 지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방중혁(55) 센터장은 “학창 시절 이곳이 방송국일 때, 퀴즈대회에 나갔었다”며 낡은 건물에 정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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