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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한 잎 한 잎...찻잎으로 느끼는 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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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03면

녹차 제작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밭에서 잎을 하나씩 따서(사진 1),찻잎을 고른 뒤(사진 2),무쇠솥에 넣고 덖으며 찻잎의 숨을 죽인다(사진 3).뜨거운 찻잎을 식힌 다음(사진 4),잘 우러날 수 있도록 찻잎을 멍석 등에 대고 비빈다(사진 5).이 같은 작업을 두세 차례 반복한다.

추위에 얼어 죽은 차나무, 여기저기 붉은 잎새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빗발은 제법 굵었고 잠깐이었지만 천둥도 쳤다. 더 큰 문제는 동해(凍害)를 입은 차나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 섬진강을 따라 하동읍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을 지나갈 때였다. 벚나무는 연분홍 꽃망울은 다 떨궈버리고 이제 연두빛 잎사귀로 새 단장을 시작했건만, 주변 풍광은 그렇지 못했다. 가파른 계곡 기슭 곳곳에 만들어진 차밭이 척 보아도 불그레했다. 계곡 응달쪽과 매서운 강바람이 몰아쳤을 강변 쪽은 붉은 정도가 더 심했다. 녹차가 아니라 홍차가 연상됐다고나 할까. 1975년부터 쌍계제다를 운영해 오면서 2006년 농림부로부터 차 명인(名人)에 선정된 김동곤씨는 “올해 생산량이 너무 적을 것 같아 큰일”이라고 걱정스러워했다.

햇차 수확하는 입하 앞두고 남녘 하동 차밭을 가다

그에게 하동 차의 특징을 물었다. “지리산 화개동 쌍계사 주변은 차 시배지(始培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삼국사기』제10권 신라본기 흥덕왕 3년(827년)조에 보면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고 돼있습니다. 이후 화개동은 임금님께 차를 바치는 곳, 즉 어차동천(御茶洞天)이 되었지요. 초의선사의 제자인 범해스님(1820~96)은 ‘…보림사 작설은 감영에 실어가고/화개의 진품차는 임금께 바쳐지네’라는 차노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동군 이종현 홍보계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특히 하동의 야생차는 산기슭 돌밭 사이에 자라고 있죠. 물이 잘 빠지고 강변이라 안개가 많고 다습해 차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증기로 쪄내는 다른 지역과 달리 차를 ‘덖는’ 방식으로 고급수제 녹차를 만들고 있죠.” 솥에 채소를 넣은 뒤 기름을 두르고 불을 때면 ‘볶는’ 것이고 기름을 쓰지 않으면 ‘덖는다’고 한다. 이 같은 ‘덖음’ 방식으로 처음 상업용 차를 생산한 사람은 조태연(1919~96)·김복순(1916~92) 부부로 알려져 있다. 2002년 국제신문에 한국 차 이야기를 연재한 소설가 정동주에 따르면 김복순씨는 일제 식민지시절 일본의 차 공장에 일하며 어깨너머로 덖음 방식을 터득했다.

해방 이후 남편 조씨와 부산에서 살던 김씨는 어느 날 차를 다시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남편과 차나무를 찾아 전국일주에 나서게 된다. 이들은 야생 차나무 군락을 발견한 하동에 자리를 잡았고 62년부터 이 방식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들 부부의 7남매 중 셋이 가업을 잇고 있다. 셋째 조성호씨가 ‘조태연가 죽로차’를, 여섯째 조성기씨(지난해 작고)가 ‘무향다원’을, 막내 조연옥씨가 ‘산녹차’라는 브랜드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명원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명원다원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2008년 7월 한국기록원 인증)가 있는 도심다원을 비롯해 고려다원·삼우다원·차공간 한밭제다, 그리고 차박물관을 겸한 악양의 매암다원 등이 하동 녹차의 이름을 떨치고 있다.

불과 물과 차의 절묘한 조화가 다도의 핵심
차를 제대로 마시는 일, 즉 다도(茶道)의 핵심은 조화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최근 출간한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에서 “다도란 차와 물과 불이 서로 최상의 조합으로 만나 다신(茶神)을 불러내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의 경지”라고 정리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중화(中和·불과 물의 어울림)와 중정(中正·물과 차의 어울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초의선사의 『다신전』을 중심으로 정민 교수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품천(品泉)>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체(體)다. 좋은 물(진수·眞水)이 아니고는 그 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제대로 만든 정차(精茶)가 아니면 그 체를 엿보지 못한다.” (차가 정신이면 물은 육체다. 물이 아무리 좋아도 제때에 따서 법대로 만든 차가 아니면 물맛을 알 수가 없다. 이 둘의 절묘한 결합, 정신과 육체의 조화는 필수다.)

<화후(火候)>
“문화(文火)가 과하면 물의 성질이 부드럽다. 부드러우면 물은 차에 항복하고 만다. 무화(武火)가 승하면 불의 성질이 매섭다. 매서우면 차가 물에 통제를 받는다. 모두 중화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물과 불 사이에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포법(泡法)>
“물 끓이기가 알맞게 이루어지면 솟아오르는 물을 떠서 먼저 다호(茶壺) 가운데 조금만 붓는다. 탕으로 냉기를 제거하고 따라낸 뒤에 찻잎을 넣는다. 많고 적고를 잘 가늠해야 하니 중정을 잃으면 안 된다. 차 쪽이 무거우면 맛이 쓰고 향이 가라앉는다. 물 쪽이 많으면 색깔이 말갛고 맛이 엷다…. 나누어 따라 마신다. 따르는 것은 너무 빠르면 안 되고, 마시는 것이 너무 늦어도 안 된다. 빠르면 다신이 미처 나오지 않고, 더디면 묘한 향기가 이미 사라져 버린다.”(결국 다도는 진수와 정차를 얻고, 문무의 화후를 알맞게 조절하여, 물과 차의 조화를 통해 찻잎에서 다신을 건강하게 추출해 내는 과정인 셈이다.)

악양에서 중정다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창수씨는 “차를 만드는 과정이 곧 나를 수양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차를 마심으로써 비로소 차는 완성된다”는 얘기도 했다. “300도로 달군 무쇠솥에 찻잎을 올려놓고 잎이 타지 않게 빠른 손놀림으로 숨을 죽이는 첫 덖음부터 150도 정도로 낮춘 무쇠솥에서 맛을 내기 위한 마지막 공글리기 단계까지, 과정은 같지만 매번 다릅니다. 그 미묘한 차이가 깊은 맛을 냅니다. 한마디로 차 만들기는 답이 없어서 재미가 있습니다.”

제16회 하동야생차축제 5월 4일부터
하동군의 전체 매출은 3500억원. 이중 차는 270억원, 부가산업까지 합치면 800억원 규모다. 벼농사에 이어 두 번째다. 녹차행정전문가로 꼽히는 하동군 통상교류과 이종국 과장은 “농촌도 문화를 팔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강에 좋은 웰빙 이미지를 살려 4월부터 10월까지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이 차 맛을 직접 느끼게 하고, 삼각뿔형 망사형 티백을 활용한 고급스러운 제품으로 대중화를 꾀한다는 전략이다.

마침 5월 4일부터 8일까지 하동군 화개면과 악양면에서는 제16회 하동 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문화관광체육부 선정 대한민국 최우수축제에 3년 연속 선정된 행사다. 한밤중 평사리 섬진강가 드넓은 모래사장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섬진강 달빛차회’를 비롯해 ‘대한민국 차인(茶人)한마당’ ‘차 시배지 다례식’ ‘올해의 좋은 차 품평회’ ‘최고(古) 차나무헌다례’ ‘녹차요리 콘테스트’ 등이 준비돼 있다. 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진행되는 ‘최참판댁 오색 찻자리’도 흥미롭다. 안채에서 윤씨 부인과 나누는 규방다례(閨房茶禮), 서희가 할머니께 올리는 햇차 시연, 사랑채에서 명예 최참판과 나누는 선비다례, 행랑채에서 직접 다식을 만들어 차와 함께 나누고 오감으로 차를 느껴보는 명상 프로그램인 차훈득기(茶薰得氣) 등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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