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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창업, 정상 궤도에 올려 놓고 떠나는 허진호 아이네트 사장

중앙일보

입력

회사가 안정되고 나니 좀이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시작할 때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시 밤도 새우며 새로운 기술 기업을 일구고 싶습니다.”

벤처 기업을 새로 창업하기 위해 연간 매출액 6백억원(2000년 전망치) 규모의 탄탄한 벤처 기업 사장 자리를 내던지기로 한 허진호 아이네트 사장(39)은 “회사가 생각보다 빨리 안정돼 새 밀레니엄, 개인적으로는 불혹의 나이에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며 밝게 웃었다.

그가 일으킨 아이네트는 94년 민간기업으로선 처음으로 인터넷 접속 서비스(ISP) 사업을 시작한 회사로, 한국통신·데이콤 등과 함께 국내 3대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 출범 당시 언론매체들은 “국내 최초로 설립된 이 인터넷 전문회사가 한국통신과 데이콤의 인터넷 가입자수를 하루 만에 앞질렀다”고 대서특필했다.

창업 이듬해 대기업들이 잇따라 인터넷 시장에 진출하자 그는 한국전력·삼보컴퓨터·제일제당 등으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유치한다. 98년 8월 IMF 관리체제의 고비에서 그는 다시 미국의 인터넷 서비스 업체 PSI넷에 주식을 전량 매각한다.

사전에 설비투자비가 많이 들어가는 반면 가입자들이 많아져야 비로소 흑자가 나는 ISP 비즈니스의 속성상 외자 유치는 당시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PSI넷은 직원들과 시설을 모두 인수했고 그는 전문경영인으로 남았다.

4천 9백 80개 국내 기업에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아이네트는 2002년 매출액 1천억원 규모의 인터넷 기반 종합 통신 서비스 회사로 발돋움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일종의 ‘엑시트 스트래티지’(퇴진 전략)죠. 기업은 영속성을 지닌 존재지만 창업자는 언젠가 회사를 떠나야 합니다. 벤처 기업은 창업은 쉽지만,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전문적인 관리자가 필요해요. GE의 잭 웰치 같은 사람이죠. 그런 전문가가 맡아야 회사도 크고 전문경영인도 부자가 됩니다. 창업자는 지분을 매각해 번 돈으로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구요. 창업자로선 창업도 퇴진도 하나의 이벤트라고 할 수 있죠.”

이것이 미국 벤처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넷스케이프를 창업한 마크 앤드리슨과 제임스 클라크도 넷스케이프를 떠났다.

국내에선 지난해 가을 최고 경영자를 영입, 창업주가 경영에서 손을 뗀 인터넷 경매회사 (주)옥션을 이런 케이스로 볼 수 있다. 창업주가 자기 지분을 고수하려는 바람에 위기를 맞는 벤처 기업들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허사장이 시도한 일련의 투자 유치는 당연히 눈길을 끌었다.

“벤처 창업자, 벤처 기업 자체, 벤처 캐피털, 증시 등 벤처 기업을 에워싸고 있는 내외의 환경은 유동성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어요.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커뮤니티랄까요? 우리나라는 창업자들이 대부분 경영까지 떠맡고 있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메디슨의 이민화 회장 같은 타고난 경영자도 있지만, 국내 벤처 기업의 3분의 2 이상이 전문경영인이 맡으면 가치가 더 올라갈 회사들입니다. 창업자가 버티고 있으면 일정한 규모 이상 회사가 못 커요.”

98년 9월 PSI넷으로부터 스톡옵션을 받은 그는 기한이 안 돼, 받은 스톡옵션의 4분의 3을 행사할 수 없다. 몇십억(평가이익) 되는 돈을 앉아서 날리는 셈이다. 그는 “회사 새로 차릴 돈도 충분하고, 열심히 뛰면 그보다 더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네트의 창업정신은 ‘재미있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자’이다. 시간이 나면 직원들의 자리를 돌며 아무에게나 그는 불쑥 묻는다. “요즘, 재미 있어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느끼는지, 신이 나는지, 주변에 장애물은 없는지 탐색해 보기 위해서다. 스스로 의미를 느끼고 동기를 부여한 일은 밤 새워 매달려도 피곤한 줄 모르는 법.

“제가 그래요. 돈이 많이 벌리더라도 재미없는 일은 못할 것 같아요.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회사를 설립하고 궤도에 올려 놓는 것까지가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섭니다.

관리는 제 몫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관리자가 되면 당신 스스로 재미를 못 느낄 것”이라고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창업자들이 제 때 못 물러서는 건 경영자를 일종의 간판으로 보는 문화적 풍토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부 벤처 기업들의 마구잡이식 사업 확장에 대해서는 그러나 날카롭게 비판한다. “미국에서도 벤처 기업들이 신규사업에 진출하지만 기존 사업과 함께 벌일 때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분야에 그칩니다. 우리나라처럼 금융업에 진출하고, 무슨 프로 선수단을 인수하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요.”

벤처를 한다면서 재벌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보다 포털, 인터넷 쇼핑, 커뮤니티 등 된다 싶은 모델로 몰려가고, 인터넷 비즈니스의 주가가 뜬다고 실체 없는 회사를 만들어 내는 것도 그의 눈엔 문제다. 주식회사 설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을 공모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그는 지적했다.

정부의 벤처 정책에 대해서는 미시적인 차원의 직접적인 자금 지원이나 규제는 오히려 독(毒)이며, 거시경제적 차원의 경기부양책과 저금리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꼭 10년 전인 지난 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한 과학재단의 후원으로 영국서 밟기로 했던 포스트닥 과정을 포기하고, KAIST 동기가 차린 벤처 기업 휴먼 컴퓨터에 개발 담당 이사로 들어간다.

KAIST 시절 은사 전길남 박사의 영향이었다. 국내에 인터넷을 도입해 ‘인터넷의 대부’라고도 불리는 전박사는 “KAIST의 학생들은 사회적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는 만큼 이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깨어 있는 사고, 사심 없는 자세는 교수의 길을 꿈꾸고 있던 허진호의 의식을 흔들어 놓았다.

“가치관, 도전적인 사고방식 등 지금의 제 모습을 만들어 주신 분이죠.”

92년 초 삼보컴퓨터에 스카우트된 그는 “연구소만 아니면 어디든 가겠다”고 했다. 생산도 맡기면 해 볼 생각이었다. 이 곳에서 그는 해외사업 기획, 기술 지원, 마케팅, 영업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94년 8월 마침내 그는 KAIST 출신 2명 등 5명과 함께 아이네트를 창업했다. 과학원 시절 인터넷 연구의 해외 파트너였던 미국 엔지니어의 창업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도 인터넷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아이네트는 사람을 뽑을 때 성적증명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전공도 묻지 않는다. 성적과 전공은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팩터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전산학을 전공하고 성적도 좋은 사람이 오히려 적응을 못하는 것도 봤습니다.

성적이 좋다는 건 일정한 기준에 맞다는 거지, 일을 대하는 태도-적극적이고 긍정적이냐 아니냐와는 관계가 없어요. 다른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선 학력도 하나의 레퍼런스(참고사항)일 뿐이에요.”

그는 1백60명의 직원들 중 어느 학교 출신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 시작할 사업은 인터넷을 통해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응용 서비스 공급(ASP). 미국서는 98년부터 붐이 일고 있는 신종 인터넷 비즈니스이다.

10년 후인 50대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나이 50에 괜찮은 초등학교 하나 세우는 것이다.

“친구 때문이든, 교사 때문이든,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서든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일본 도쿄에 사는 초등학생 처조카는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답니다. 초등학교 교육이 제일 중요해요. 특히 지식정보화사회에선 초등학교 때 틀이 갖춰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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