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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⑪ 한국경제인협회 재직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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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가운데)이 1961년 8월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 제1차 임시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1961년 농업은행에서 강제해직을 당하면서 내 금융인생의 방향도 달라졌다. 63년 나는 한국경제인협회에 들어갔다. 지금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다.

 농업은행 복직을 알아보다가 경제인협회를 선택하게 된 데는 묘한 인연이 작용했다. 고향 선배이자 농업은행 선배인 김주인 이사가 마침 경제인협회 초대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인사차 만났더니 반색하며 나를 맞았다. 그는 “내가 은행에 오래 있어봤지만, 실물경제를 알려면 여기가 경험 쌓기에 훨씬 낫다. 여기로 와라”고 나를 설득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김 이사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사업가의 꿈이 있었다기보다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모인 경제인협회가 뭐 하는 곳인지 잔뜩 호기심이 발동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대우가 은행보다 더 좋았다.

 경제인협회 전신은 경제인협의회로, 민주당 장면 정권 시절인 61년 1월 기업인들이 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 모이자며 만들었다. 수출 진흥과 실업 해결을 위한 정책대안도 제시했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협의회는 해체됐다. 군사정부는 자유당 정권 아래서 부정축재를 했다는 혐의로 기업 총수 13명을 구속했다.

 이후 정부는 이들을 석방하면서 약속을 받았다. 부정축재금으로 공장을 지어서 국가에 헌납하도록 한 것이다. 경제개발이 시급했던 정부로서는 부정축재금을 기간산업 개발자금으로 활용하는 한편, 산업화를 위해 기업인들의 지속적인 협조를 얻고자 했다. 그리고 구속됐던 기업인 13명이 주축이 돼 61년 7월에 만든 단체가 바로 한국경제인협회였다. 초대 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맡았다.

 경제인협회는 공업화를 위해 굵직굵직한 일을 많이 해냈다. 정부와 경제계가 중지를 모아 탄생한 첫 작품이 62년 초에 기공식을 연 울산공업센터다. 이듬해엔 구로동 수출산업단지 건설 계획도 짜는 등 경제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부정축재 조사 과정에 흥미 있는 일화가 있었다. 그 당시 부정축재 조사위원장을 지낸 연일수라는 소장 출신 분이 나중에 경제인협회로 왔을 때 들려준 얘기가 있다. “삼성은 앞으로 잘되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는 이렇다.

 당시 부정축재금 규모는 개별기업의 정치헌금액과 탈세액의 합계, 기업 내의 주주 가불금과 근거가 불분명한 접대비 합계액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결정됐다. 기업들이 부정축재로 가장 많이 걸린 게 업무추진비 등 경비 지출이었다. 업무추진비의 근거가 불분명하면 다 부정축재금으로 잡혔다.

 연일수씨 말로는 당시 삼성물산은 이미 부장은 얼마, 과장은 얼마라는 식으로 접대비 지출 규정을 두고 있었다. 조사하면서 ‘이건 무슨 돈이냐’고 물으면 규정에 따라 쓴 것이라며 근거를 분명하게 댔다. 그런 걸 다 빼고 보니, 실제 쓴 경비에 비해 부정축재금은 적게 잡혔다. 회사의 경영 틀을 당시부터 제대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관리의 삼성’이란 면모를 갖춘 게 아닐까 싶다.

 당시 가장 잘나가던 중앙건설은 이와 대비됐다. 건설업계의 대표기업이었던 중앙건설은 그 위세가 대단했다. 지금은 삼성이 소유한 태평로빌딩이 중앙건설 본사였다. 사주인 조성철 회장은 회사 이름이 적힌 노란 지프로 건설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직접 지시했다. 그리고 내부적인 규정 등을 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경비가 사주의 접대비로 분류돼 곤욕을 치렀다.

 그래도 조성철 회장은 통이 컸다. 부정축재금을 국가에 낼 때 다른 기업은 다 공장을 지어 헌납했는데, 조 회장만 유일하게 이를 전부 현금으로 납부했다. 옛날 서울 시경 근처 땅을 팔아서 현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내 기억에 조 회장은 선이 굵은 정의파였다. 건설업계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열성적인 기업인이었다. 입찰 같은 것을 공개해야 한다고 앞장서서 주장하기까지 했다.

 경제인협회에 4년여 있으면서 기업인들을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본 창업 1세대 경영인들은 사실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돈을 좇는 사람은 상인에 머무르고 말지만 이들 기업인은 꿈을 좇는 사업가들이었다. 당시 기업 창업자들은 부지런하고, 철저하고, 궁금한 것을 항상 질문하는 개척자들이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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