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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영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수인(囚人)
번호 3223번. 공무상 비밀누설과 공문서 변조 및 동행사 혐의로 대검 중수부에 구속돼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 대검 중수부장과 부산지검장, 법무차관을 거친 후 제28대 검찰총장을 지냈고 그뒤 법무부 장관으로 영전했으나 불과 보름만에 경질됨.

지난 한해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던 옷로비 사건에는 부인이 연루됐고 본인은 파업유도 사건과 관련됐다는 의혹을 받았음. 부부 모두 검찰조사와 국회 청문회 증언, 특검 수사를 잇따라 받는 해방 이후 최초의 기록을 세웠음.’
이쯤만 되면 누구나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김태정(金泰政)
전 검찰총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누군가를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무엇보다 분석이나 평가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가 E·H 카는 “과거에 대해 기술(記述)
하고 해석하는 역사가조차 자기가 속한 시대가 갖는 특정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과거의 역사를 논할 때도 그런 마당에, 현존하는 인물에 대해, 그것도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이 객관적 분석과 평가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 전 총장에 대한 해부를 해보려 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1999년이라는 특정한 시점에 우리 사회의 혼란과 혼돈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김태정이라는 인물은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가 보여준 모습과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고, 모순과 갈등을 함축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사회 자체가 갖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김태정식’으로 반영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을 오갔다.
그는 김영삼 정부 말기인 97년 8월, 호남 출신으로는 해방 이후 최초로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그는 YS정권 때 박종철 전 검찰총장이 그랬듯 옷을 벗고 쫓겨난다는 게 애초의 관측이었다. YS와 워낙 가까웠던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DJ로부터도 각별한 사랑과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그의 부인 연정희씨는 IMF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조르고 있는 마당에 다른 고관 부인들과 함께 호화 의상실로 몰려다녔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무주택자다. 검찰총장이 된 뒤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대검 청사 근처의 빌라에 전세들어 살았다. 공직자 재산공개 때마다 그는 언제나 법조계 인물들 중 최하위 서열에 랭크돼 왔다.

그에게는 ‘정치검사’라는 비난이 항상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검찰의 수장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소탈하고 소박한 구석이 많다는 평가도 받는다. 도대체 그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 “우리 마누라는 고아나 다름없어”

인간 김태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의 가정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의 가정사를 남들이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부인 연씨가 연루된 옷로비 파문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에 그의 부부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 전 총장은 YS정권 초기인 93년 대검 중수부장으로 있던 시절, 가까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만취한 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 마누라는 고아나 다름없어. 다른 놈들은 처가집 덕을 톡톡히 보고 승승장구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혜택을 전혀 입어본 적 없어. 처음에 집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더니 우리 어머니가 엄청나게 반대하셨어. 홧병으로 눕기까지 하셨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곤 입을 닫아버렸다. 평소 그는 기자들이 부인에 대해 질문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매일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닌다”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곤 했다. 이 때문에 부인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었다.

그러다 옷로비 사건이 터진 뒤 연씨가 검찰 수사를 받고 국회 청문회에 출두하면서 조금씩 연씨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연씨의 학력이 고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일부 언론은 연씨와 관련해 떠돌아다니는 온갖 명예훼손성 풍문을 마구잡이로 기사화하기도 했다.

김 전 총장이 어떻게 해서 연씨와 결혼하게 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본인이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은 김 전 총장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해군 법무관으로 복무할 당시 만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연씨는 당시 가세(家勢)
가 기우는 바람에 진해에서 음악다방을 하던 친척집에 머무르며 디스크 자키를 했고 이때 김 전 총장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있을 법한 이야기다.

김 전 총장은 젊은 시절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부인 연씨 역시 젊은 시절에는 빼어난 미모를 소유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훤칠한 키에 짙은 눈썹을 가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해군 장교와 미모의 음악다방 디스크 자키의 소설같은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임은 금방 짐작이 간다. 법조인들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한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주로 가문 좋고 돈 많은 명문가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런 마당에, 사법고시 합격자가 한 해에 몇십명 정도에 불과했던 60년대에야 오죽했겠는가.

김 전 총장의 고백대로 집안에서 ‘기를 쓰고’ 반대했지만 그는 결국 연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같은 결혼은 젊은 시절 김태정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그는 법률가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정교함이 별로 없고 계산적이지도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신 의리를 중시하고 즉흥적이며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경향이 많다는 게 그를 접해 본 사람들의 이구동성이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결혼 초기의 사랑의 단꿈에서 깨어나 현실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아마도 검사 김태정은 많은 갈등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인이 고졸 출신이라는 것이나 처가가 내세울 게 별로 없어 물질적으로나 배경으로나 검사인 자신의 출세에 별 도움이 안된다는 현실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김 전 총장의 부인 연정희씨는 지난 7월 국회 청문회에 나와 “남편은 평생 청렴하게 살아왔고 나 역시 한번도 호화스럽고 사치스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어떤 때는 김칫거리 살 돈이 없어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런 증언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검찰총장의 부인이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검사들 역시 “어렵게 산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까지야”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 “재산 모아봐야 물려줄 아들도 없는데…”

하지만 김 전 총장의 평검사 시절, 함께 술을 마시다 한밤중에 어깨동무를 하고 그의 집으로 쳐들어갔던 기자들이나 선후배 검사들은 허름한 몸뻬 차림으로 술상을 내오던 연씨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곤 한다. 김검사는 전세집에 살면서 변변한 세간조차 없더라는 것이다.

이들 부부가 현실이 부여하는 이같은 갈등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인 연씨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를 함으로써,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됨으로써 위안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옷로비 사건이 터진 뒤 일부 언론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김 전 총장이 평검사 시절, 검사장이 후배 검사들을 부부동반으로 초대했고 김 전 총장 부부는 우연히 따로 따로 방문하게 됐는데, 연씨의 옷차림이 너무 남루해 검사장 부인이 연씨를 파출부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연정희씨는 또 매일 새벽기도를 나간 것으로 알려진다. 김 전 총장도 간혹 따라갔던 모양이다. 김 전 총장은 자신에게는 아버지 같던 큰 형님이 별세한 뒤 충격을 받아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인 연씨의 영향 역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 김 전 총장은 복잡한 사건이 터지면 “우리 집사람과 함께 새벽기도에 가서 열심히 기도했으니 다 잘 풀릴 것”이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매우 민감하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기왕지사 김 전 총장의 가족사를 얘기하려면 이미 장성해 결혼했거나 결혼을 앞둔 그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 전 총장은 딸만 셋이다. 그는 가끔 술에 취하면 아들이 없는 아쉬움을 얼핏얼핏 드러내기도 했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한번은 막내딸이 나에게 ‘아빠 내가 딸인 줄 알았으면 낳지 않았을 거지’하는 거야. 어린 마음에 되게 고민을 했던 가봐.”

그는 공직자 재산등록 때마다 언제나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공직자 재산공개가 시작됐을 때 3억원을 신고했다. 40명의 검사장들 중 끝에서 세번째였다. 그 흔한 콘도 이용권이나 골프장 회원권 하나 없었고 재산이라고는 달랑 아파트 한채에 1천만원 정도의 저금, 낡은 자동차 한대가 전부였다.
호남 출신인 그가 YS정부하에서 사정의 칼자루를 휘두르는 대검 중수부장에 임명된 것도 이같은 청렴성이 크게 고려된 결과였다.

◇ “검사 안했으면 아마 기자 됐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의 씀씀이가 작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직위에 이르면 사업에 성공한 고교 동창들이나 동향의 기업인들이 후원회를 결성해 이리저리 도와주는 게 한국적 풍토다.

그는 후배 검사들과 기자들을 회식자리와 술자리로 가장 많이 끌고 다니는 검사였다. 그는 언젠가 기자들이 “재산도 맨날 꼴지를 마크하면서 술만 자꾸 사면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하자 “딸들이야 키워 놓으면 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지 않겠나. 나는 재산 모아봐야 물려줄 아들도 없는데”라며 시니컬하게 웃기도 했다.

그가 80년대에 대검 중수부 과장을 하던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건에 쫓겨 집에 안들어가기를 밥먹듯 하다 1주일만에 술에 취해 돌아갔더니 아파트 경비원이

“검사님 집은 며칠 전에 이사가셨잖아요”하더라는 것이다. 그때서야 그 며칠 전 “이사를 가니까 오늘은 가능하면 집에 와서 이사를 도와달라”던 부인의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일에 미치고 날마다 술에 절어 사는 이런 아빠를 딸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법무차관 시절 김 전 총장은 “딸애한테 ‘괜찮은 검사 하나 소개시켜 줄테니 결혼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검사하고는 절대 결혼 안한다고 하는 거야. 그러고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훌쩍 가버렸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의 가정생활은 장관과 총장을 거친 다른 검찰 간부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김태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검사였다. 무엇보다 언론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그는 언론을 매우 좋아했다. 나이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막내 동생뻘도 안될 젊은 기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는 서울대 법대 시절 학생기자를 했다고 한다. 또 “검사를 안했으면 기자를 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지위가 매우 높아지면서부터는 좀 줄어들긴 했지만, 그는 어느 술자리에 가든지 기자들과 마치 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폭탄주를 돌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김 전 총장이 젊은 기자들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탁 털어놓고 얘기하는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술이 취하면 자기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도 했고. 어떤 때는 기자들의 집으로 찾아가 “제수씨, 술 한잔 주시오”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런 태도에 대한 평가는 가지각색이었다. 검사장급 이상 간부들은 너무나 파격적인 김 전 총장을 약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곤 했다. 젊은 검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더 많았다. “검사장이나 되는 분이 왜 그리 체통없이 행동하느냐”며 그의 무게없음을 비판했다. 물론 일부 검사들로부터는 “정말 인간적인 검사”로 평가받기도 했다.

기자들 사이에서 김 전 총장은 비교적 인기가 높았다. 그와 함께 서너번 술을 마시고 난 다음에는 대부분 그를 호의적으로 바라봤다. 반면 많은 기자들이 너무 그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나머지 소수의 기자들로부터는 오히려 반감을 샀던 것도 사실이다.

◇ 경기고 출신들에 대한 적대감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는 엘리트들의 집합소라는 K1(경기고)
출신들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거부감은 그의 직위가 낮을 때는 그저 가슴 속에서 남모르게 타던 불씨였다. 하지만 그가 성공과 출세의 계단을 성큼성큼 밟고 올라가 마침내 호남 출신 최초의 검찰총장이 되고 난 뒤에는 여기저기에서 화염(火焰)
으로 번졌다.

98년 2월21일,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정권이 막 출범을 앞둔 때였다. 김윤성 대검 공보관이 부랴부랴 기자실로 내려왔다. 그는 “김태정 총장님이 하신 말씀인데 기자들에게 공개하라고 해서 그대로 전한다”면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 경기고 출신들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

당시 검찰은 대선 직전인 97년 말 수사를 유보했던 ‘DJ비자금 고발사건’ 수사를 재개해 김대중 당시 대통령당선자로부터는 서면조사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고발했던 한나라당측을 조사해야 하는데, 이회창 총재(당시는 명예총재)
가 검찰 소환에 불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총장은 이에 대해 “이총재의 검찰조사 불응은 법조인 출신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는 자기 인기 관리만을 위해 교묘하게 여론을 이용하는 타고난 정치인”이라며 공보관을 통해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분명 경솔한 짓이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사정의 중추기관인 검찰의 총수가 야당 총재를 공개 비판하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물건너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당은 이를 갈았다. 새로 출범하는 정권의 입맛에 딱 맞는 얘기를 검찰총장이 한 마당이니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야당은 그를 ‘블랙리스트 1순위’에 올려놓았다.

그뒤 야당은 건수가 있을 때마다 그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그는 섣부른 말 한마디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하지만 기자는 김 전 총장이 이회창 총재를 그토록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은 학연과도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경기고 출신들에 대한 김 전 총장의 뿌리깊은 ‘원한’이 또다른 배경이라는 것이다.

김 전 총장의 성향은 엘리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민중주의쪽에 가까운 편이었다. 경기고 출신들은 명석한 두뇌에 명문가 출신의 깔끔한 스타일들이 많은 반면 김 전 총장은 시골(전남 장흥)
출신에다 술자리에서는 누구하고나 금방 ‘형님, 동생’으로 어울리는, 기존 질서와 틀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타입이어서 원래부터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이 경기고 출신들과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은 인사 때문이었다.

그는 YS정권이 출범한 뒤 중수부장을 맡으며 정권차원에서 보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동화은행 비리수사, 율곡사건과 군수뇌부 비리 수사 등을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마무리한 것이다. 그런데도 94년 서울지검장 승진 인사 때 ‘물’을 먹었다. 법조내 최대 인맥인 경기 인맥이 김 전 총장의 라이벌이었던 모 검사장을 집중적으로 밀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법무장관은 경기고의 법조계 대부격인 김두희씨였다.

김 전 총장은 그뒤 술자리에서 몇차례나 “경기, 정말 나쁜 놈들”이라며 격한 감정을 표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인사에서 그는 서울지검장 대신 부산지검장으로 부임했다. 평소 김태정을 아끼던 김영삼 대통령은 그에게 위로전화를 했다고 한다. 김태정은 그때 “각하, 너무 억울합니다”하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의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울음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뒤 부산을 방문한 YS는 여러 기관장들이 모여 있는 데서도 김태정 부산지검장에게만 다가가 말을 걸면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97년 말 법무차관 재임 당시 김기수 검찰총장의 후임을 놓고 그는 또 다시 경기고 인맥과 격돌했다. 이번에도 경기 출신들은 맹렬히 뛰었다. 하지만 YS는 이번에는 김태정의 손을 들어줬다.

김 전 총장이 97년 10월 DJ비자금수사 유보를 결정한 것은 YS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경기고에 대한 김태정의 감정도 깔려 있던 게 아닌가 싶다. DJ와 맞섰던 이회창 총재가 경기고 출신이었고, 만일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면 ‘경기고 세상’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은 죽게 된다는 판단 말이다.

◇ “호남 사람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김태정은 묘한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밉살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고향은 전남 장흥이었다. 김태정 역시 광주고를 졸업했다. 하지만 법조인 대관에는 출생지가 부산으로 적혀 있다. 다른 검사들과는 달리 출신 고등학교도 빠져 있다. 고향이 전남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가 어디서 출생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열한살 때까지 부산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고향을 ‘부산’으로 적어놓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언론에서는 이 대목을 ‘기회주의적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수십년 동안 경상도 정권이 이어지면서 호남 출신들이 많은 차별을 받아왔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이북 출신조차 서너명이 총장직을 맡았지만 경기고, 고려대에 이어 검찰내 세번째 인맥을 자랑하는 호남 출신 중에서는 김태정 총장 이전에는 50년이 넘도록 단 한명의 총장도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호남 출신 고위 공직자들 중에는 고향을 밝히기 꺼리고 심지어 자식들의 본적을 서울로 만들어 주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김 전 총장이 자신의 고향을 부산으로 적어 놓은 것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 전 총장은 언젠가 “총장을 그만두면 고향에서 정치인으로 출마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호남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라며 쓸쓸히 얘기한 적이 있었다.

처가 덕도 못보고 집안도 내세울 게 없는 데다 호남 출신이라는 불이익까지 덮어쓰고 있는 판이니 그래도 뭔가 연줄을 댈 수 있는 부산을 내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애처롭고, 또 어찌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지난 70년 대구지검 영덕지청 검사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검사 시절 초반기는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남들이 다 높은 곳에서 ‘고공 플레이’를 하고 있는 동안 그는 혼자 온몸으로 뛰어다니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일은 주변의 눈치를 안보고 열심히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사 초임 시절에 선거철이 됐는데 위에서 부정선거 사범을 엄단하라는 거야. 그래서 불법선거운동을 한 여당 운동원들을 무더기로 잡아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지. 그런데 다음날 가보니 서장이 전부 풀어준 거야. 화가 나서 또 여당 운동원들을 마구 잡아 넣었지. ”

그의 회고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심한 얘기지만, 그가 하도 좌충우돌하며 여당쪽을 괴롭히니까 검찰 수뇌부에서 감찰조사까지 내려보낸다. 하지만 당시 감찰부장이던 김석휘씨는 전후 사정을 알고는 “당신이야말로 진짜 검사다. 기죽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며 김태정 검사를 격려했다. 김태정은 감격했고, 그때부터 ‘김석휘 사람’이 됐다고 한다.

지금도 검찰 내에서 존경받는 김석휘씨는 그뒤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82년 검찰총장에 오른 김석휘씨는 의정부에서 부장검사를 하던 김태정을 대검 중수부 과장으로 데려온다. 파격적인 일이었다.

오랫동안 한직을 돌며 ‘빽없는 설움’을 당해왔던 김태정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일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이사간 것도 잊어버릴 만큼 일에 몰두했고, 스스로 술자리를 만들고 쫓아다니며 그동안 목말랐던 ‘사람 사귀기’를 넓혀갔다는 것이다.

◇ 김태정의 도박 ‘DJ비자금 수사 유보’

일단 능력을 인정받고 난 다음부터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82년 대검 중수3과장을 시작으로 대검 중수1과장,서울지검 특수3부장, 특수1부장 등 요직을 거쳤고 90년 서울지검 2차장, 91년 동부지청장 등 선두코스를 줄줄이 밟아간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스스로는 넘을 수 없는 목표물을 긴 장대를 들고 훌쩍 뛰어 넘어가듯 그는 ‘김석휘’라는 장대를 얻고 난 뒤에는 펄펄 날아다녔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또다른 ‘장대’를 얻게 된다.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였다.

그와 김현철이 어떻게 맺어지게 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뒤 그는 검찰내 ‘소산인맥’(小山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호인 거산

巨山)을 빗대 김현철을 지칭하는 말)으로 분류된다.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 때 그가 중수부장으로 발탁된 것도 ‘소산의 힘’이 작용했다는 게 검찰내 정설이다.

그가 경기고 출신들의 맹렬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호남 출신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것도 결국 소산을 올라가 거산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김영삼 정권의 임기가 끝나갈 때쯤 또다른 선택을 한다.

97년 검찰총장에 임명된 김태정은 대통령선거 와중에 불거져나온 DJ비자금 수사를 유보했다. 이는 하나의 도박이었다. 자신을 임명해 준 정권이 임기를 다해가고, 누가 새로운 정권의 주인이 될지 모르는 가운데 김대중 후보 쪽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고향을 부산이라고 적어 놓았어도 결국 전라도 사람일 수밖에 없었던 출신 배경, 경기고에 대한 뿌리깊은 감정, 자신을 임명한 YS의 요구 등 3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자금 수사를 유보하는 걸 보고 김태정 총장이 올바른 검사라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YS사람’이던 김태정은 김대중 정부하에서도 검찰 사상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검찰총장, 대통령이 아끼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순풍에 돛을 단 듯 달려가던 그의 인생행로는 결국 극적인 반전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하늘 높이 올라갔을 때 갑자기 장대가 부러져버린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그는 소설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너무도 드라마틱한 추락을 맞이했던 것이다.

99년 한해, 인간 김태정의 몰락 과정은 끔찍할 지경이었다.
1월에 터져나온 대전 법조비리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심재륜 전 대구고검장의 항명파동, 평검사들의 서명 사태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만으로도 이미 그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봤다. 심 전 고검장은 “후배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정치권에 빌붙어 있는 정치검사인 수뇌부부터 퇴진하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을 생명처럼 여기는 게 검찰 조직임을 생각한다면 검사들의 입에서 “물러나라”는 얘기가 나온 그 순간부터 김태정은 이미 검찰총장으로서는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다.

만일 김 전 총장이 그때 조직을 위해 사표를 던져버리고 검찰을 떠났다면, 그는 그 이후의 모든 오욕과 불명예로부터 자유로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대한 검찰 내부의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다.

◇ “최순영 구속시켰더니 결국 이런 일이 생겨…”

하지만 김 전 총장은 출세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남들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조건과 배경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결정과 노력만으로 따낸 출세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너무 비참했다. 김 전 총장 부부가 지난 한해 동안 당한 수모는 인간적인 동정심까지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그들 부부는 여론의 공적 1호가 됐고 자신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비난받았다. 사직동팀 내사─검찰수사─국회 청문회─특검수사로 이어진 옷로비 사건의 전말이야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재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정 부부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선배들이 총장이 되면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몰랐다. 온갖 로비를 물리치고 신동아그룹 회장을 구속시켰더니 결국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하며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부인 연정희씨의 죄는 다른 고관 부인들과 호화 의상실로 몰려다니고 나훈아쇼를 보러 다니는 등 처신을 현명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연씨는 위증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옷로비 사건의 본질은 아니었다. 연씨의 고백대로 ‘수백만원짜리 옷을 외상으로 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남편의 앞길을 망칠까봐’ 거짓말을 하게 됐고, 그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결국 끔찍한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다.

연씨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지켜본 사람들은 “남편이 총장이 되고 나서 사회적 지위는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연씨 자신은 그런 상류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고관 부인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휘둘린 측면이 강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세간의 비난 여론과는 달리 연씨는 ‘마녀’가 아니라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 전 총장은 대통령이 보는 문건을 신동아 로비스트 박시언씨에게 건네줬다는 비밀누설 혐의가 적용돼 구속됐다. 하지만 “조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는데 신동아그룹측에 가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하세요”라며 문건을 보여준 게 비밀누설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검찰파동’ 당시 김총장에 대해 반대서명까지 했던 서울지검 검사들이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신청되자 “법리적으로도 구속은 말이 안된다”며 반발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김 전 총장 구속의 진짜 죄목은 “처신을 경솔하게 한 점”이라는 말이 나오
고 있다.

‘인간 김태정의 삶’을 돌이켜 곱씹어 보면 그가 정치검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정의감 넘치고 혈기방장한 검사 김태정은 세월이 흘러가고 지위가 높아지면서부터는 서서히 “고위직에 오르려면 어떤 식으로든 정치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검사가 다 그런 게 아니냐”는 항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심재륜 전 고검장 같은 ‘고집쟁이에 딸깍발이 검사’들도 적지 않은 마당이니, 이것이 면죄가 될 수는 없다.

특히 90년대 이후 직위가 높아지고 스스로 내리는 결정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철저히 정치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너무도 정치적이면서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

어찌보면 그는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목표물을 넘어서기 위해 ‘장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위기 상황 때마다 적절히 장대를 바꿔가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권력과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열심히 충성하는 것만이 그가 벗어나고 싶었던 많은 핸디캡들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지금 스스로 저지른 과오나 실책에 비해 훨씬 가혹하고 잔인한 처벌을 받고 있다. 그것도 부부가 함께.

김태정 부부는 12월 초 서로 손을 잡고 특검 사무실에 출두했다.
김 전 총장이 앞으로의 여생을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장대를 잡는 게 아니라, 비록 자신의 출세를 완전히 파멸로 몰고 갔다고 해도 부인 연씨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 달라는 게 ‘너무도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정치적이었던 검사 김태정’을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김종혁 기자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90호 2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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