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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함과 페이소스, 한 음 한 음에 절절한 회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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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호 04면

'Wish You Were Here’ 음반 표지(1975년).

다소 군내 나는 흑백 TV 시절,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범인을 몰래 뒤쫓는 긴박한 순간 어김없이 등장하던 신비로운 느낌의 소리다발들-. 재깍재깍 초침이 돌고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통통거리는 타악기 리듬이 금세 거들며 춤춘다. 바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Time’(1973년)이란 곡이다. 지금도 수사반장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핑크 플로이드, 이 팀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박진열 기자의 음악과음락사이 - 핑크 플로이드의 9집 앨범 ‘Wish You Were Here’(1975년)

런던의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는 몽환적 프로그레시브 록의 에베레스트산이랄 만하다. 뒤얽히고 퉁겨내며 오감을 자극하니까 프로그레시브다(가령 지지직거리는 30년대 구닥다리 델타 블루스에 귀 기울이다가도 나는 전율하곤 한다. 무릇 초절한 테크닉의 힘보다 뮤지션이 토해내는 진정성, 그 힘이 더 센 법이므로). 1960~70년대의 핑크 플로이드는 말할 것도 없이 전위 그 자체다. 상투성을 깨부순 진보적 구성력이 빛을 발하는 곡이 대부분이다. 프리즘을 투과하기라도 한 듯 초현실적 빛의 사운드가 넘실댄다. 그건 황홀경의 콜라주다. 아름다운 카오스다.

'달의 어두운 저편’으로 소리 탐험을 하던 1972년께 핑크 플로이드의 네 사내.왼쪽부터 리처라이트 (키보드·2008년 타계), 데이비드 길모어(기타·보컬), 닉 메이슨(드럼),로저 워터스(베이스·보컬).

초기 앨범에 담긴 ‘Interstellar Overdrive’(67년), ‘Echoes’(71년) 같은 사이키델릭 명연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다. 언제 들어도 망아(忘我)랄까 일탈의 짜릿함이랄까, 온몸의 털끝이 쭈뼛 서는 극치감을 안겨줘서다. 뿐더러 보다 넓고 보다 야릇한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드라마틱한 여정이기도 하니까. 그러다 난데없이 에릭 돌피(Eric Dolphy), 롤랜드 커크(Roland Kirk) 같은 멀티플레잉 재즈맨(60년대 초엽 아방가르드 재즈 동네를 뒤흔든 ‘해탈’한 귀신들)까지 불쑥 떠오를 쯤이면 열락과 나는 이내 한몸이 되곤 한다.

다들 굉장한 매력덩어리인 당대의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계열 라이벌들을 생각한다. 재주꾼 로버트 프립(Robert Fripp·기타)의 킹 크림슨(King Crimson) 음반들을 거푸 듣다 보면 간혹 까탈스럽게 뭐라뭐라 투털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분석적 색채가 짙은 그들 중기의 명반들이 특히 그렇다. ‘키보드의 지미 헨드릭스’ 키스 에머슨(Keith Emerson)이 이끈 에머슨 레이크 & 파머(약칭 ELP)는 또 다른 맛이다. 보드랍게 몸을 열다가도 광란의 휘몰이로 치닫는 그 거장적 연주 말이다. 어떨 땐 ‘어째 너무 현학적인 거 아니야?’ 싶을 정도다. 가령 ‘Pictures At An Exhibition’(전람회의 그림) 같은 앨범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그에 비하면 핑크 플로이드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편이다. 전체적인 밸런스와 센스가 완벽에 가까운 ‘The Dark Side Of The Moon’(73년)류의 우뚝한 명반 몇몇 장 덕분이려니, 나는 생각한다.

핑크 플로이드 이 팀, 분명 한 시대 혁신적 록 사운드의 아이콘일진대 아이러니한 구석이 있다. 아방가르드한 소리 풍경, 거기엔 의외로 의고(擬古)랄까 쿰쿰한 먼지 내음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수십만 광년쯤 떨어진 은하계 저편에서 날아든 사운드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 적도 있다. 프로그레시브와 레트로-, 핑크 플로이드 음악의 그 휘황한 스펙트럼엔 이처럼 아득한 쓸쓸함마저 스며 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세례를 받은 이라도 취향이 다 같을 순 없겠다. 내가 첫손 꼽는 이들의 매그넘 오푸스는 아홉 번째 정규 앨범 ‘Wish You Were Here’(75년)다. 사실 진보성만 놓고 보면 전작들만 못하지만 무엇보다 시드 버렛(Syd Barrett, 기타·보컬)에 대한 그리움이 아릿해서다. 일찌감치 핑크 플로이드 팀을 떠난-정신착란을 이유로 쫓겨난-재인(才人) 아닌가. 관통하는 한 음 한 음, 시드 버렛에 대한 멤버들의 절절한 회한이 녹아있다(‘Shine On You Crazy Diamond’ ‘Wish You Were Here’). 무상함과 페이소스, 그 사이로 번뜩이는 광기 같은 것에 나는 쉬이 젖어들곤 했다. 뭐 이런 게 인생의 조각들 아니겠느냐며.

부질없는 얘기지만 시드 버렛이 오래도록 팀에 머물렀더라면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베이스·보컬·67)의 전횡만큼은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이 팀의 기타 플레이어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65)의 묵직한 존재감조차 묻히기 일쑤였으니까(길모어의 78년 첫 솔로 앨범에 담긴 ‘There’s No Way Out Of Here’의 짙은 우수를 떠올려 보라). 그렇다고 독불장군 로저 워터스가 시종 마뜩잖다는 건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곡 대부분을 지은 그 아닌가. 사실 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70년대 일련의 명반들, 꿈이나 꿨을까 싶긴 하다.

터무니없는 그리움이 불쑥 엄습하는 이즈음이다. 개중엔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했던 시공간’도 분명 있으리라. 거기엔 온기의 기억이 아주 느릿느릿 흐르고 있다. 나는 다시금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안락함에 집중한다. 행복하다.

(※인간과 불타는 인간이 나누는 악수, 강렬한 초현실주의풍 LP판 재킷의 아트워크 매력도 근사하다. 흡사 망막에 새겨진 사운드랄까. 이 앨범 커버 디자인은 저 유명한 스톰 소거슨(Storm Thorgerson)이 이끈 아트 집단 힙그노시스(Hipgnosis)의 솜씨다. 핑크 플로이드 앨범 중 세 개 정도를 빼곤 몽땅 이들이 빚었다. 스톰 소거슨은 수작업을 고집하기로도 이름났다. 여기 불붙은 사내, 인형이 아닌 스턴트맨이다. 이런 식이다. 요즘도 그 흔한 컴퓨터 합성 따위와 거리를 둔다는 소거슨이다. ‘진짜’와 그것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라도 그 둘은 전혀 다른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의 60년대를 빛낸 음반 커버 아트의 마술사, 리드 마일스(Reid Miles)와는 또 다른 성취다.)
rycooder@joongang.co.kr


정규 음반을 왜 앨범이라고 할까. LP판을 왜 레코드라고 할까. 추억의 사진첩이고,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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