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 시장 ‘불신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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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요즘 기업어음(CP) 시장에선 건설사의 CP 거래가 완전히 끊겼다. LIG건설과 삼부토건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으로 인한 후폭풍이다. 이들 기업은 법정관리 신청 전에 CP를 대량 발행했다. 결국 이를 산 투자자는 큰 손해를 봤다. 일부 투자자는 CP 등을 판매한 증권사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회사채 시장도 얼어붙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요즘 CP 시장은 온통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불신은 멀쩡한 기업도 옥죄고 있다.

갑자기 자금난에 빠질 위험이 있는 기업이 늘면서 어디서 ‘제2, 제3의 LIG건설과 삼부토건’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국내 CP 시장을 긴급 진단했다.

12일 현재 예탁결제원에 예탁돼 있는 기업어음(CP) 발행 잔액은 82조7360억원이다. 이 가운데 건설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4.2%(3조5509억원)다. LIG건설과 삼부토건의 사태 여파로 요즘 건설사 CP 거래는 전면 중단됐다. 전체 CP 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전체의 4%에 불과한 꼬리(건설사 CP)가 몸통(CP 시장)을 흔드는 ‘왝 더 독(wag the dog)’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과거에는 건설사 CP가 거래도 잘 되고 일반회사 CP도 거래가 정상적이었는데 LIG건설 법정관리 신청 이후 건설사 CP 거래가 전면 중단되고 전체 CP 시장도 크게 위축됐다”고 말했다.

 한국투자증권 채권상품부 관계자도 “그간 상대적으로 고금리여서 관심을 끌었지만 요즘 투자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라며 “한마디로 ‘사자’ 주문이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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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은 대기업의 회사채로 번지고 있다. 15일 회사채 시장에서 3년 만기 GS건설 회사채는 4.85%에 거래됐다. 지난 4일 발행됐을 때 금리보다 0.1%포인트가 올랐다(채권은 유통금리가 올라갈수록 가격이 싸진다). 같은 신용등급(AA-)의 다른 회사채보다 약 0.3%포인트 정도 높은 수준이다.

 한 자산운용사의 채권 매니저는 “최근 건설업종 분위기가 좋지 않다 보니 건설사 채권을 편입시키지 않으려는 분위기”라며 “우량으로 분류되는 기업도 건설사라는 이유로 회사채가 싸게 거래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용등급 BBB인 코오롱건설은 12일 250억원 규모의 회사채 만기를 갚기 위해 500억원 규모의 채권 발행을 시도했으나 투자자 모집이 여의치 않아 발행일을 19일로 미뤘다.

 CP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불신이다.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까지 ‘꼬리 자르기’의 희생양이 되자 어떤 회사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시장을 휘감고 있다. 채권단은 LIG건설·삼부토건 등을 향해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고 비난하고 있고, 건설사는 “자금 회수에만 혈안이 돼 있다”고 서로 비난하는 형국이다.

 신용등급 A0 이상인 건설사는 13개로 이들 기업은 재무구조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하지만 그 아래 등급에 있는 기업은 어떤 상태일지 몰라 전문가도, 기업도, 투자자도 불안하다. 보통 중견 건설사는 저축은행을 통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했다. 하지만 PF로 큰 손실을 본 저축은행이 자금을 회수하려 하고 있는 데다 CP 시장에서 자금 조달마저 막히면서 자금난에 빠지는 건설사가 늘고 있다.

 이윤정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신용등급 A0 미만 기업의 단순 부채비율은 100~300%지만 PF를 고려한 부채비율은 300~600%로 올라간다”며 “현재 이상한 시장 흐름은 심리적인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회사채 시장 전체가 찬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주요 채권 발행 업체인 중견 건설사에 대한 투자자의 의구심이 확대되면서 신용등급이 낮은 다른 업종이나 기업의 자금 조달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CP 시장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자금 조달 방법 가운데 CP 발행이 가장 손쉽다.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이사회 의결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CP는 어음용지에 도장을 찍어 발행하면 된다. 더욱이 2009년 2월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에선 발행자 요건과 최저 신용등급에 대한 규제까지 없앴다.

 문제는 기업이 자사의 재무사항과 위험 정도를 감추고 CP를 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증권사는 기업이 발행한 CP를 인수해 대부분 특정금전신탁상품으로 판매한다.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나간 CP는 판매사가 원금을 보장하지 않고, 투자자가 손실 위험을 모두 떠안는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의 법적 책임이 없다 보니 상품의 위험성이 있더라도 고객이 원한다면 판매하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위험을 알리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신평사의 행태도 도마에 올랐다. 삼부토건을 비롯해 LIG건설·진흥기업·대한해운 등 신평사가 투자 적격 평가를 내렸던 기업이 연이어 부도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 계열사에 대한 신용등급 평가 시 신평사는 ‘모기업의 지원 가능성’을 이유로 신용등급을 높게 매기는 관행이 일상화돼 있다.

김창규·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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