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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해적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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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저자 허락 없이 찍어낸 해외 출판물을 해적판(海賊版, pirated edition)이라 한다. 왜 해적에 비유했을까. 다른 나라 지식을 훔치는 것이 바다에서 외국 배를 약탈하는 행위와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선 외국 문학·예술작품을 무단 출판하는 일이 잦았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회장으로 있던 국제문예협회는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1886년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탄생한 게 베른조약(Berne Convention)이다. 저작권을 당사자 사후 50년까지 보호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 중 하나다.

 베른조약과는 별도로 1952년 세계저작권협약도 발효됐다. 하지만 저작권에 관해서는 베른조약이 ‘헌법’이다. 우리나라는 96년 베른조약에 가입했다. 중국은 92년, 북한은 2003년 가입했다. 현재 가맹국은 164개다. 이 정도면 웬만한 나라는 다 가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 간 지적재산권(知的財産權 ·Intellectual Property) 침해 행위는 끊이지 않는다.

 그동안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지재권 보호에서는 눈총을 많이 받는다. 요즘은 해적질이 책보다는 음악·영화·비디오·애니메이션에서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소프트웨어(SW) 쪽은 더욱 심각하다.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유독 SW산업이 맥을 못 추는 것도 만연한 불법복제 탓이다. 힘들여 개발해도 아무도 돈 주고 사지 않으니 불모지(不毛地)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산하 EIU는 2007년 한국의 IT 경쟁력을 세계 3위로 평가했다. 초고속 인터넷망, 뛰어난 하드웨어 기술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순위는 다음해 8위, 2009년엔 16위로 추락했다. 불법 카피가 여전히 왕성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1994년 국내 SW 불법복제율은 75%에 달했다. 15년이 지난 2009년엔 41%로 낮아졌다.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SPC) 등 민간단체들이 4일 서울 플라자호텔에 모여 “2020년까지 불법복제율을 20%대로 낮추겠다”는 ‘비전 20·20’ 선포식을 열었다. SPC는 불법SW만 막아도 한 해 8000억원의 세금이 더 걷히고 1만 개의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 목표를 이루려면 지식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 아이는 인터넷을 잘해 뭐든 공짜로 다운받는다”고 자랑하는 부모들도 각성해야 한다.

심상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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