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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이 말하는 영화 〈박하사탕〉…"그의 인생은 가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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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물고기〉 (97년)의 이창동 감독은 차분한 사람이다.늘 꼿꼿한 자세와 정연한 논리, 근엄한 표정으로 한치의 허점이 안보인다.

그의 이런 진지성은 한국영화의 새 지평을 개척하는 추동력으로 발산된다. 이감독이 두번째 영화 '박하사탕' 을 들고 새천년 첫날 첫시(2000년 1월 1일 자정 개봉) 관객을 찾아간다.

세기와 밀레니엄의 극적 전환점에서 그는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 속으로 되돌아가 시간과 세월을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가 익히 경험했듯 지난 20년간 우리 역사의 흔적은 결코 행복했거나 아름답지만은 못했다.

때문에 험악했던 80년대에 청춘을 묻은 386세대들에게 이 영화는 "어둡고 고통스럽게 다가올 것" 이라고 이감독은 말한다.

그런 시대의 고통이 엄연한 현실이었을진대 요즘처럼 근거없는 낙관론에 들떠 이를 지난 밀레니엄 속에 그대로 묻어 버리고 갈 수 있는 것인가. 이감독이 이 영화속에 담고 있는 생각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는 쪽이다.

"이 영화가 주인공 김영호의 삶을 통해 99년부터 79년까지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사' 이기 보다는 각 에피소드들이 늘 하나의 고리로 엮인 '현재진행형' 으로 느껴지질 바란다."

영화에서 김영호(설경구)는 IMF 구제금융의 파산자이자 고문경찰관, 어린 소녀를 살해한 광주민주항쟁의 진압군이었다. 동시대를 산 사람에게 이 가혹한 인생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감독은 현실앞에서 스러진 김영호의 삶에 그다지 사회.정치적 의미를 두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순수를 믿기때문이다.

"한 개인이 역사나 사회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외부의 어떤 파괴적인 힘도 인간의 순수한 영혼을 완전히 짓밟지는 못한다. 특별한 경우 역사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그의 삶은 그리 아릅답지 않다."

이감독은 지난 21일 광주 무등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다녀왔다. 신세대들에게 19년전 광주에서 벌어졌던 공권력의 '만행' 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감독이 이곳의 신세대들에게 느꼈던 반응은 "서울과 비슷하다" 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서울이든 광주든 젊은이들에게 역사는 과거지사로 비칠 뿐이라는 것. 그러나 이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들이 '숨겨진 진실' 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한다" 고 말했다.

〈박하사탕〉 은 지난 10월 제4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여 관객과 평단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배급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이감독은 걱정이다. 개봉 후 이감독은 "(영화를)잃어버릴 시간을 위해 여행이라도 다녀올 계획" 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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