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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동네 라디오 아나운서 … 아이들은 스스럼 없는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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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가구가 모여 사는 공동주택 앞에 설치된 나무 우편함.

성미산 마을에는 주민이 만든 시설이 40여 곳 있다. 어린이집이 네 곳과 대안학교 ‘성미산 학교’가 대표적인 교육시설이다. 반찬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옷가게도 있지만 여느 동네 것과는 많이 다르다. 옷가게 ‘되살림가게’는 헌 옷 재활용 장터이고, ‘작은 카페’는 아이들에게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먹이는 공간이다. 하나같이 동네 주민의 상상이 실현된 공간이다.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성미산 마을 사람들이 사는 얘기를 전한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국민배우 아니에요. ‘주민배우’예요.”

2007년 성미산 마을에 극단이 생겼다. 극단 이름은 ‘무말랭이’. 무말랭이처럼 물기가 빠져버린 삶 그대로의 모습을 연극으로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소싯적 배우의 꿈을 간직한 주민 10여 명이 모여 만들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연출자도 알음알음으로 불렀다. 1년에 한 번씩 모두 세 번 공연을 했다.

 2009년엔 마을 극장이 만들어졌다. 동네 주민이 모일 만한 마을회관 같은 공간과 공연을 펼칠 무대가 필요해서였다. 마을 극장은 몇몇 시민단체가 건물을 세우며 지하공간을 주민에게 내줬고, 동네 주민이 돈을 마련해 세트를 들였다. 이로써 연극 무대가 완성됐다.

 내친김에 극단은 다른 지역 무대에도 오를 생각이다. 극장 대표 유창복(50·회사원)씨는 “올해 창작극을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며 “일정만 되면 동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에게도 공연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주민배우’도 나왔다. 자칭 주민배우 이은영(41)씨는 창단 멤버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큼지막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이다. 두 번 공연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교육열 높은 엄마역과 노인을 돌보는 간병인역이었다. 동네 주민이 주요 관객인 공연이다 보니 연극이 끝나면 아이들이 대사를 따라 했다. 이씨는 “전 국민은 모르지만 적어도 성미산 주민이라면 누구나 나를 알아본다”고 자랑했다.

2 재활용품 상점인 되살림가게 앞. 청바지가 단돈 1000원.



# 동네 라디오 방송국

성미산 마을에 있는 ‘마포FM(100.7Mhz)’은 전국 7개 공동체 라디오 사업자 가운데 하나다. 공동체 라디오 사업자 중 마을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방송이다. 공동체 라디오이므로 모든 지역에서 청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껏해야 최대 5㎞까지 청취가 가능하다. 마포구와 서대문구 일부에서만 들을 수 있다.

 그래도 방송은 매일 전파를 보낸다. 오전 6시부터 이튿날 오전 1시까지 19시간 동안 방송이 나간다. 음악 방송도 있고, 시사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나 마포FM은 누가 뭐래도 동네 방송이다. 아줌마의 질펀한 수다가 이어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나운서로 출연한다.

 노인 아나운서 10여 명이 교대로 진행하는 프로그램 ‘행복한 하루’는 오전 6시 방송된다. 실제 녹음은 오후에 진행된다. 아나운서는 어르신이 맡지만, PD·작가 등 제작은 대학생이 맡는다. 서울 신촌 일대 대학교 학생들이 방송 일을 배우고 싶어 나선다.

 지난달 중순 오후 2시 녹음을 앞둔 시각. 최혜련(23) PD가 어르신 아나운서를 재촉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일본 지진 소식을 전해주셔야 해요. 여기 빠졌네요. 꼭 멘트를 넣으셔야 돼요.” PD의 닥달이 이어져도 아나운서는 느긋했다. 박길자(71) 아나운서는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지금은 아나운서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알아보니까 좋다”며 웃었다.

3 마포FM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앞둔 할머니·할아버지 아나운서와 대학생 PD. 4 성미산밥상 주방장 김광근씨가 창가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5 동네 주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트를 만든 마을 극장 내부. 6, 7 성미산 학교의 쉬는 시간. 아이들은 장난치고 창에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뛰어논다.



# 회사원 아빠가 차린 유기농 밥상

특허사무소에 다니던 김광근(43·)씨. 그는 요리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회사원이 식당을 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꿈꾸는 밥상은 조미료 없이 100% 유기농 재료만 쓰는 식당. 그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던 건, 성미산 마을이었기에 가능했다.

 2009년 초부터 김씨는 마을 주민을 상대로 한 달에 한 번 요리교실을 열었다. 전국에 있는 유기농 식당을 다니며 요령을 익혔고, 요리교실을 열면서 한식과 양식 조리사 자격증도 땄다. 김씨의 요리교실에 참석한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 둘 그의 요리 솜씨를 믿기 시작했다. 동네 주민의 호응이 이어지자 그도 식당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주민 10명이 500만원씩 출자도 약속했다.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뿌리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뜻을 펼쳐보기로 했다.

 마침내 올 1월 그는 유기농 식당 ‘성미산밥상’의 문을 열었다. 김씨는 “이윤도 조금 남고 많이 팔지도 못하는 ‘박리소매(薄利少賣)’이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니 괜찮다”며 “점심 시간엔 근처 회사에서 직장인들도 찾아온다”고 귀띔했다.

8 네 가구가 한 층씩, 4층 건물인 공동주택.

# 한 지붕 네 가족

윗집·아랫집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노는 마당, 가끔 일이 생길 때면 아이 밥 좀 대신 먹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이웃.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가끔은 떠올려보는 소박한 소망이다. 그러나 성미산 마을에서 이와 같은 이웃은 헛된 꿈이 아니다.

 성미산 마을엔 공동주택이 두 채 있다. 4층 주택으로 한 층에 한 가구씩 들어가 산다. 공동주택은 빌라 형태와 비슷하지만 뒤쪽에 자그마한 뜰이 있다. 각 층은 실내로는 연결돼 있지 않고, 바깥 계단으로만 연결된다. 이 주택 안에 네 가구가 모여 산다.

 송민수(39·주부)씨 가족도 2008년부터 성미산 아래에 공동주택을 지어 살고 있다. 아이를 성미산 학교에 보내는 다른 학부모와 의기투합했다. 송씨는 “집마다 이유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집은 형제가 없는 아이가 외로움을 많이 타서 함께 놀 이웃 아이가 필요했고, 아이가 뛰어 놀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송씨가 사는 집은 네 가구가 땅값 2억원에 건축비 2억원을 들여 지었다. 2층에 있는 송씨의 집은 115㎡(약 35평) 정도의 크기에 베란다가 나와 있다. 송씨는 “처음엔 사생활이 노출될까 봐 걱정했는데 살아보니 오히려 실망스러울 정도로 그런 게 없다”며 “하지만 친한 이웃이 곁에 있어 늘 든든하다”고 말했다.

● 가보려면 … 성미산 마을을 여행하는 건 ‘공정여행’을 실천하는 일이다. 공정여행이란 관광객이 이익을 주민에게 돌려주고 환경을 생각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한 여행을 말한다. 성미산 마을을 여행하면서 쓰는 돈은 모두 마을을 운영하고 가꾸는 수익으로 돌아간다. 공정여행은 애초 제3 세계 국가들을 여행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국내 여행에서도 공정여행의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성미산 마을은 그 첫 사례다.

 성미산 마을은 혼자 돌아다니기보다 마을 안내팀의 설명을 들으며 하는 게 좋다. 마을에는 자체적으로 안내팀 ‘길눈이’를 꾸리고 있다. 하지만 길눈이도 상근하는 게 아니라서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신청을 해야 한다. 성미산 마을 홈페이지(cafe.daum.net/sungmisanpeople)에서 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하면 된다. 성미산 마을은 단체 방문을 주로 받는다. 개인으로 신청할 경우 단체 방문이 있는 날에는 다른 신청자와 함께 둘러볼 수 있도록 조정한다. 단체 방문은 15명 내외가 적당하다. 방문 기금으로 단체 1팀에 15만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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