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9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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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희망캐기 (31)

이튿 날이었다.겨울 답지않게 사뭇 포근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뿐만 아니라, 위판장의 스레이트 지붕이 찢겨 날아갈 정도로 바람도 드세게 불었다.선착장 부근을 할 일없이 궁싯거렸던 관광객들의 모습도 빗자루로 쓸어버린 듯 했고, 조업을 나가지 못해 발이 묶인 초췌한 어선들만 방파제를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부대껴 이물께와 고물께를 번갈아가며 쉴새없이 깝죽거리고 있었다.신안 전장포에서 왔다는 새우젓차 한 대가 신안염에 절인 동백하를 사라고 혼자 공허하게 떠들어대며 횡뎅그레한 선착장 거리를 바람에 떠밀리듯 쉬엄쉬엄 가로지르고 있었다.창녀들의 거리가 그런 것처럼 밤에 화려하게 보였던 것일수록 낮에보면 더없이 초라해 보인다.지난 밤에휘황하게 붉을 밝혀 현란스럽기까지 했었던 횟집들의 넓은 창문들과 붉게 도료된 간판들 조차 해안을 휩쓸고 지나온 뿌연 모랫바람으로 금방 썰렁하게 더렵혀지고 있었다.선착장에서 딩구는 어구들과 널려있는 낡은 그물들, 녹쓸고 망가져 삐닥하게 흐느적거리는 채낚기 어선들 역시 스산하고 을시년스런 포구의 정경을 그려내는데 없어선 안될 소도구들처럼 보였다.배가 들어오지 않아도 언제나 위판장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함지박의 잡어를 팔며 소일하던 몇몇 늙은 아낙네들도 오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뚜껑을 자른 드럼통에 화톳불을 피워두고 구멍난 그물을 깁는 장화 신은 남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싸구려를 목메어 불러대던 새우젓차가 어디론가 멀리 사라진 오전 10시를 넘긴 시각에 백사장 포구에 비로소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싸게 안나오고 뭣들하고 있는겨 시방."

서문식당 뒷문을 바라보며 탐탁찮은 한마디를 던지고 있는 사람은 방극섭이었다.뒤곁으로난 쪽 문을 열고 삐쭘하게 얼굴만 내민 사람은 뜻 밖에도 박봉환의 아내 희숙이였다.그녀는 남편 아닌 방극섭에게 앙탈부리듯 쏘아부쳤다.

"그렇게 깝치지 마세요.곧장 나갈꺼예요."

"곧장 나오겠다는 사람들이 시방 난데없는 구들막 농사 짓자는 겨?"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난데없는 구들막농사가 왠 말이예요?"

"그럼 어째 싸게 안나오고들 굼뱅이들처럼 굼실대고 있는겨?"

희숙은 대꾸않고 쪽문을 닫아버렸고, 방극섭은 닫긴 쪽문을 향해 입귀를 비쭉하고 담배를 불달아 물었다.그리고 훌쩍 운전석으로 뛰어올라 시동을 걸고, 몇 번인가 연거푸 귀청이 따갑도록 크렉션을 눌러대었다.좀처럼 짖는 법이 없었던 개가 집모퉁에서 훌쩍 뛰어나오며 방극섭을 향해 목이터져라 짖어대었다.술청에서 채비를 하던 손달근의 아내가 남편에게 쏘아 부쳤다.

"아니 저 사람은 남의 개를 왜 고롭히고 그래요?"

한참뒤에 쪽 문을 열고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승희와 배완호, 그리고 손달근의 내외, 그리고 나중 나타난 것이 박봉환과 희숙이였는데, 희숙의 차림새는 근래에 보기 어려울만치 요란벅적했다.아래위가 온통 꽃무늬 투성인 투피스로 차려 입은 것도 심에 차지 않았든지 위에 껴 입은 외투까지 온통 꽃무늬 치례였다.게다가 금반지와 귀고리에 굽 높은 구두였다.머리는 금방 미장원을 다녀왔다는 소문을 내느라고 구름처럼 떠 부풀려 있었다.박봉환이가 안고 있는 젖먹이는 보통이로 얼마나 싸동였는지 아이는 보이지 않고 역시 꽃무늬 치례인 보통이만 보였다.조수석으로 오르는 승희에게 물었다.

"갈길이 Q찮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째 이렇게 늦었오이? 누가 가지 않을라고 앙탈이라도 부렸소?

"미장원 갔던 희숙씨가 늦게 나타난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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