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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흔들리는 땅, 침착한 일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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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무서운 광경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SF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그 광경이 이웃 일본에서 벌어졌다는 것도 현실감을 더했다. ‘나루터의 파도’(津波)로 읽히는 쓰나미가 ‘항도를 덮치는 거대한 물기둥’으로 돌변하는 순간 아름다운 수목의 도시 센다이는 악몽으로 변했다. 심해에서 머리를 맞댄 두 개의 대지판이 틈새를 찾고 내주려고 한 뼘 정도 움직인 결과였다. 센다이와 동북부 해안지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뭍으로 돌진하는 거대한 물기둥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방송 앵커의 절규에는 자연 앞에 인간은 미물이라는 상식을 종종 잊은 것에 대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지진에 어지간히 단련된 일본 국민들도 역사상 최대의 동북부 대지진 앞에서 몸을 떨었다. 70 평생 이런 지진은 처음이라는 비명처럼 피해는 추산을 불허했다. 급기야 원전이 폭발했다. 게센누마시(市)는 전복된 연료 선박 기름이 온 도시를 덮쳐 밤새 타올랐다. 그러나 침착했다. 침착해야 했다. 도쿄 특파원들의 현장 취재 기사들은 숙달된 일본인들의 차분한 대피행동에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인이라고 왜 공포가 없겠는가만, 땅이 꺼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화염이 치솟고, 차량이 뒤엉키는 가운데에도 건물방재센터가 대피방송을 했고 시민들은 재난 매뉴얼을 따라 행동했다. 정부가 즉각 방재시스템을 가동한 것은 물론이다. 상비된 헬멧을 찾아 쓰고 대피소 앞에서 줄 서는 시민들의 모습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지축이 흔들리고 바다가 성난 맹수처럼 일어날 것에 대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많다’는 교훈을 참혹한 재난 역사로부터 배웠고 대비훈련을 일상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 저런 쓰나미가 덮칠 가능성은 없는가. 다행히 ‘안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답이다. 그러나, 이 질문보다 언제 어디로 닥칠지 모르는 대재앙에 ‘우리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유라시아판의 안정된 지점에 앉은 덕에 지진이나 쓰나미는 우리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재앙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투자는 부끄러울 만큼 뒤졌고, 시민들의 방재의식과 조직 수준은 거의 제로다. 불과 17년 전,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인근에서 일하던 작업 선박이 제일 먼저 사건 현장에 도착했고,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방송 앵커가 먼저 와서 구조대를 기다릴 정도로 우리의 방재체계는 후진적이었다. 초강풍이 서울 도심지를 강타한 그 시각에야 태풍 상륙을 알렸던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이에 비해,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은 6400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지만, 시민과 공사(公私) 조직이 어떻게 사전, 사후 재난대책을 실행하는가를 보여준 계기였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방재국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적 훈련이다. 매달 한 번꼴로 실시되는 방재훈련에서 기본요령을 습득한다. 500명 학생이 대피 완료하는 데에 3분가량이면 족하다. 어릴 적부터 일본어로 ‘밀지 마’, ‘뛰지 마’, ‘떠들지 마’의 약자인 오카시(おかし)를 익힌다. 모든 건물엔 방재용품을 비치하고, 긴급재난 시 공공건물이 대피소로 전환된다.

  세계 최고 방재력의 비밀은 중앙정부 외에 3중 구조로 된 민간 자원조직에 있다. 자원조직은 가히 세계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각 마을마다 주민 자치로 운영되는 재해자원센터가 기초조직인데, 소방단을 특별히 운영하는 곳도 전국에 2474개소가 된다. 89만 명의 자원자가 활약한다. 소방단은 평소에는 친목회 성격을 띠지만 유사시에는 방재기구로 전환한다. 2차 조직은 모든 시·정·촌(市·町·村)에 결성된 재난시민단체로서 화재 방지, 소화훈련, 대피, 이재민 보호와 수송을 담당한다. 고베 대지진 복구의 주력부대가 이들이었다. 전국에서 자원봉사자와 단체가 구름처럼 몰려 규모 7.3 지진이 초토화한 시가지를 단기간에 치유했다. 이를 계기로 3차 조직인 전국방재네트워크가 세계 최초로 1999년 결성되었다. ‘방재NPO’로 알려진 이 전국 조직은 산·학·관·민의 협력을 진작시키며, 지진 발생 당일 오후 6시를 기해 구제활동에 돌입했다.

 12일 일본 중부 니가타와 나가노현에도 중규모 지진이 발생했다면, 관서지역과 동해도 결코 안전지대는 아니다. 1980년 이후 10여 차례 중규모 지진이 감지된 한반도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다. 자연의 생리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대비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는가. 일본의 피해복구가 빨리 이뤄지기를 기원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