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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54) 국회의사당에 얽힌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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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의사당로 1번지. 대한민국 국회의 주소입니다. 푸른 돔 지붕만으로 ‘정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곳이죠. 해마다 봄철만 되면 자기 지역구 의원의 초청으로 국회를 찾는 이들이 수천 명은 될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본회의장 한번 스윽 둘러보고 지역구 의원과 기념사진 한 장 찍은 뒤 다시 관광버스에 오르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놓치기 아까운 얘기들을 국회는 많이 품고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만 골라 소개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다가오는 봄에는 국회를 찾아 경내를 찬찬히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남궁욱 기자

1 정일권 전 국회의장 “왜 파란색 아니냐” 역정

여의도의 순우리말은 ‘너섬’이다. 너섬 국회의 상징은 본관의 푸른색 돔형 지붕이다. 이 지붕은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 브이’의 머리와 비슷하다. 지난달 12일 이 만화의 영화화를 추진 중인 영화사 ㈜로보트태권브이는 레이저쇼 기술로 의사당 지붕에서 태권 브이가 출동하는 장면을 연출해 내기도 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면 국회의사당의 지붕이 열리고 로보트 태권 브이가 출동한다”는 농담까지 생겼다.

하지만 국회의 돔 지붕은 원래 파란색이 아니다. 1975년 준공 때만 해도 지붕은 붉은색이었다. 지붕의 표면은 동판으로 돼 있는데, 동판이 부식되면 녹이 생긴다. 동판에 처음 생기는 녹이 빨간 색이었던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로 1번지에 위치한 국회 본관(의사당)의 전경. 2007년 12월에 설치한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과 조명시설 덕분에 화려한 야경을 자랑한다. [중앙포토]



당시 중앙청(일제식민지 때부터 서울 세종로에 있었던 정부청사)과 같은 파란 지붕을 기대했던 정일권 국회의장은 빨간 지붕을 보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정 의장은 푸른색 지붕을 요구하며 사무처 건설국을 닦달했다. 동판이 더 부식하면 빨간색의 녹은 파랗게 바뀐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파란 녹을 일부러 내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동판의 부식 속도를 높이기 위해 사무처 건설국은 전전긍긍했다. 선우종원 당시 국회 사무총장은 “건설국장이 ‘밤에 돔에 몰래 올라가 방뇨를 했다’고 하더라”고 회고한 일도 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의사당 지붕은 파란 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파란색 돔형 지붕에 대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너무 권위적이다”라거나 “공중에서 보면 국회 본관이 꼭 상여처럼 보인다” 등이었다.

이런 지적들 때문에 1998년에는 돔 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려는 검토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정부예산을 쓰기엔 국회에 대한 국민 여론이 너무 안 좋았다.

2000년엔 돔을 황금색으로 칠하기 위한 예산안이 국회 운영위까지 제출됐다. 그러나 여론 때문에 전액 삭감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도 의사당 본관 지붕은 푸른 색이다.

2. 해태상 밑엔 포도주들이 잠들어 있어

국회의사당은 두 쌍의 해태상이 지키고 있다. 후문의 것(왼쪽)은 2008년, 정문의 석상(사진 오른쪽)은 1975년에 설치됐다.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해태상 한 쌍이 준공 때부터 서 있다. 해태는 시비·선악을 판단하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쳐 준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국회에 해태의 석상을 들여놓은 이는 다름 아닌 해태제과다. 해태제과는 75년 국회 준공 때 3000만원을 들여 이 석상을 만들어 국회에 기증했다. 당시 1인당 국민총소득이 30만원 정도였던 시절이니 꽤 큰 액수의 기부였다.

해태제과는 해태상을 기부하면서 해태주조㈜에서 최초로 개발한 100% 국산 와인을 석상 아래 땅 밑에 묻었다. 여의도 국회 개원 100년이 되는 2075년에 건배주로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묻은 와인은 장기숙성용 와인은 아니었다. 포도주가 숙성되지 않고 쉬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포도주를 건배주로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64년 뒤 파봐야 한다.

2008년 본관 후문 앞에는 새로운 해태 한 쌍이 설치됐다. ‘신참 해태’인 셈이다. 국회엔 현재 두 쌍의 해태가 공존하고 있다.

3. 국회에 ‘남근석’이 생긴 이유

2008년 4월 국회 사무처는 해태상과 함께 국회 본관 후문 앞에 간판석을 세웠다. ‘국민과 함께 하는 민의의 전당’이란 문구가 쓰인 이 바위는 높이가 무려 7m에 달한다.

이 간판석은 여의도 주변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높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양새가 독특한 ‘남근석(男根石)’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간판석이 서자 갖은 소문이 따라왔다. 그중 대표적인 게 “여의도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화장터였기 때문에 음기(陰氣)가 센 곳이다. 이 음기를 누르기 위해서 남근석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실제 이 간판석을 설치할 때 국회 사무처 내에서도 “‘특수한 목적’이 있는 만큼 남근석엔 아무런 글도 새기면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간판석은 설치 이듬해인 2009년 5월에 인적이 드문 헌정기념관 뒤 공터로 옮겨졌다. 설치에만 2억1000만원이 들었던 국회의사당의 기념물은 1년여 만에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됐다. 더불어 “여러 사료(史料)에 따르면 여의도는 목장으로 쓰였다. 궁녀들의 화장터였다는 얘기는 근거가 없다”는 해명성 소문도 함께 돌았다.

17대 국회에서 해태상과 간판석을 설치했던 김태랑 사무총장은 열린우리당 출신이었다. 18대 국회 들어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된 뒤 국회사무총장은 한나라당 출신 박계동 전 의원이 맡았다. 간판석을 치운 건 박 총장이었다.

박 총장은 간판석을 치운 대신 새로운 국회의 상징물로 한옥 건축을 결정했다. 의원동산에 한옥을 지어 국회를 찾는 외빈과 방문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사업에 드는 공사비는 36억6000만원이다.

이렇게 ‘의회권력’이 교체되면 그때마다 이전 국회의 상징물을 없애거나 무시하고 새 상징물을 만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이런 일에 들어가는 돈은 모두 국민세금이다.

4. 국회엔 여성의원 전용 사우나도 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정원은 299명이다. 이들이 저마다 7명의 보좌관(2명)·비서관(2명)·비서(3명)를 데리고 일한다. 여기에 국회 사무처와 도서관 직원까지 합치면 국회 울타리 내에 상주하는 인구는 엄청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니 국회 내엔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농협지점 등 은행과 우체국 사무소, 매점은 기본이다. 세탁소·미장원·이용실·구두수선소에 내과·치과·한의원·약국이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빵집과 안경점·서점·꽃집까지 영업 중이다. 최근에 지어진 국회예산정책처에는 한강변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커피전문점도 들어섰다. 본관 지하에는 교회와 성당·선원(禪院)까지 완비돼 있다.

의원들을 위한 사우나나 체력단련실, 남녀 보좌관들을 위한 수면실과 샤워실 등은 ‘기초시설’에 가깝다.

이 중 여성의원 전용 사우나는 우여곡절 끝에 들어섰다. 의원회관 지하에 있는 이 공간은 2004년 17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만들어졌다. 2001년부터 여성 의원들이 남성의원용 사우나만 있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일부 여성 의원들이 “동료 여성 의원들을 모아 남성 의원용 사우나를 점령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 ‘여탕’이 생기게 됐다.

위부터 1948년 5월~1950년 6월 중앙청 의사당, 1950년 7월~1954년 5월 임시 의사당, 1954년 6월~1975년 8월 태평로 의사당, 1975년 9월~ 현재 여의도 의사당

국회의사당 여의도 입성기

중앙청→대구→부산→시민회관

유랑생활 끝내고 1975년 정착

현재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문을 연 건 1975년 8월 15일이다. 69년 제헌절이었던 7월 17일에 기공해 6년 만에 공사를 마치고 이날 준공식을 했다.

여의도 국회의 전체 면적은 33만580m²(약 10만 평). 여의도 전체 면적의 8분의 1 정도에 해당한다. 이 중 의사당인 본관의 면적은 8만1442m²(약 2만4600평)다.

그러나 초창기 국회는 ‘유랑국회’를 면치 못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48년 5월 31일 개원했다. 제헌국회는 서울 세종로 중앙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조선총독부로 쓰였던 건물에서 제헌국회를 열었으니 명예로운 출발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국회의 팔자는 더욱 고단해졌다. 피란 시절엔 대구 문화극장, 부산 극장에서 국회 본회의를 열어야 했다. 경남도청의 부속건물(무덕전)에서 회의를 연 때도 있었다. 서울 수복 후 일단 중앙청으로 복귀했다가 시민회관별관, 해군본부 등을 전전했다. 결국 6대 국회 들어서야 ‘남북통일 후에도 쓸 수 있는 넉넉한 의사당’을 염두에 두고 공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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