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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이름을 기억하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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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지난 14일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조그만 밸런타인 데이 리셉션에 초대를 받았다. 초대 메일을 읽으면서 국무부 건물의 공식 명칭이 ‘해리 트루먼 빌딩’이란 걸 알았다. 미국에 사람 이름을 딴 건물이 많은 줄이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외정책을 책임지는 국무부 건물까지 특정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놓았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깨닫고 보니 더 보이는 게 있었다. 특파원으로 일하며 자주 들러야 하는 워싱턴의 관공서들이 대부분 사람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백악관 기자회견실 왼쪽 벽에는 ‘제임스 브래디 프레스 브리핑 룸’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브래디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변인이었다. 그는 1981년 레이건에 대한 암살시도 사건 때 총격을 받았다. 대통령 바로 옆에서 공무를 수행하다 불구의 몸이 된 브래디를 기리기 위해,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가 매일 서 있었을 기자회견실 벽에 그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워싱턴에서 가장 큰 건물인 의사당은 상·하원 의원들의 집무실과 회의장 등으로 활용되는 ‘오피스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다. 상원의 ‘하트’ ‘덕슨’ ‘러셀’ 빌딩은 모두 상원 의원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원이 사용하는 ‘레이번’ ‘롱워스’ 빌딩 이름의 주인은 전 하원 의장들이다. 의사당 동쪽 뒤편에는 세계 최대 면적과 장서 수를 자랑하는 의회도서관 건물 3개가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의 이름이 ‘토머스 제퍼슨 빌딩’이다. 미·영 전쟁 기간(1812~1814년) 동안 도서관은 큰 피해를 보았다. 이듬해 제퍼슨은 자신이 소중히 모았던 6487권의 책을 모두 도서관에 넘겼다. 날씨가 좋은 날 의사당에서 백악관을 향해 걷다 보면 중간쯤에서 ‘에드거 후버’ 빌딩(FBI 본부)을 만난다.

 미국 관공서 빌딩 이름들엔 공통점이 있다. 목소리 큰 외부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곳에서 매일 일하는 ‘빌딩 주인’들이 주도적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점, 그리고 한번 정한 이름은 조직의 권력이 바뀌어도 결코 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미국 사회가 과(過)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공(功)을 더 높이 사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해군 UDT의 전설 고(故) 한주호 준위는 지난해 3월 침몰한 천안함에서 한 사람의 실종자라도 더 구해내려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의 영결식에서 건장한 UDT 장병들이 애써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국민이 울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 한 준위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까. 미 국무부엔 올해 초 ‘홀브룩 강좌’가 신설됐다. 40년 넘게 외교관으로 일하다 지난해 말 근무 중 심장이상으로 숨진 리처드 홀브룩을 기리기 위한 행사다. 이제 미 외교관들은 매년 1월 홀브룩을, 홀브룩의 정신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다양한 영역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너무나 인색했다. 관공서든 기업이든 헌신한 사람들에게 ‘김OO 강당’ ‘이OO 회의실’을 헌정하는 것은 어떨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삶을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