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과천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 ‘우유값 인상’ 없던 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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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3월 급식 시즌에 필요한 우유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일단 제과·커피 회사에 할인해 납품하던 제품 가격을 일반 제품 수준으로 올려달라 요청한 것이다.”(16일 오후 3시29분)

 “의사 타진 과정에서 빚어진 오류다. 납품가격 인상 계획이 없다.”(같은 날 오후 7시37분)

 국내 우유업계 1위 업체인 서울우유가 16일 제과·커피 회사에 공급하는 우유 가격을 50%가량 올리려다 네 시간여 만에 뒤집었다.

 문제의 발단은 영업부서에서 대형 거래업체들에 유가 인상 여부를 통보하는 공문을 발송하면서 불거졌다. L당 900~1000원 선에서 공급하던 커피·제과용 우유 가격을 50%가량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제품가를 인상하려 했던 거래처는 CJ그룹(뚜레쥬르)과 신세계그룹(스타벅스), SPC그룹(파리바게뜨) 같은 대기업들이다. 서울우유협동조합 본사 차원에서 관리하는 대형 업체들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인터넷과 전화로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일반 우유값도 오르는 것이냐’는 항의성 문의가 쏟아졌다.

 거래처들도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계약 기간과 공급가격이 업체별로 따로 명시돼 있는 만큼 일방적인 가격 인상 통보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저항했다. 서울우유로서는 상당한 압박이었다. 사실 우유 시장은 기본적으로 대형 수요처가 ‘갑’인 시장이다. 평상시에는 공급량이 수요에 비해 많기 때문이다. 구제역이 끝나고 다시 공급량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대형 수요처가 물량을 소화해주지 않으면 고스란히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서울우유가 그동안 생산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가에 계속 납품해온 이유다.

 정부의 압력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우유 관계자는 이날 “직접 정부청사까지 찾아간 것은 아니지만 회사 윗분과 농림수산식품부 관료 사이에 전화가 오간 것으로 안다”며 “우리가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16일 오후 내내 서울 상봉동 서울우유 본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주요 간부들은 휴대전화로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직원들도 퇴근을 미룬 채 회사에 비상 대기했다. 본격적인 의견교환이 이뤄진 지 세 시간여 만인 오후 7시쯤 “가격 인상은 본사 방침이 아니라 일선 영업부서와 거래처 간 의견교환 중 빚어진 해프닝”이란 입장을 정하고 가격 인상을 철회했다. 우유값 인상을 우려했던 대형 수요처와 소비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서울우유는 한순간에 말을 바꾸는 기업이 되고 말았다. 물가와의 전쟁을 선언한 정부의 가격 통제 논란 속에 빚어진 일이다.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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