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폰 가입자를 고사시켜라!’

중앙일보

입력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막 올라온 할아버지가 서울역 앞에서 공중전화를 찾는다. 전화 부스 앞엔 끝도 없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줄 선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보자 앞 사람에게 바싹 다가서기 바쁘다.

바로 이때 할아버지 주머니에서 보란듯이 나오는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시티폰이다.
한 시티폰 서비스 업체가 지난 97년 내보냈던 텔레비전 광고 `‘시골영감편’이다.

97년 3월 서비스를 시작한 시티폰은 셀룰러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싼 요금(10초당 8원, 셀룰러폰은 26원선)
을 내세워 몇 달 만에 7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받는 쪽이 20%, 거는 쪽이 80% 정도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화습관 조사 결과까지 제시하며 전문가들이 시티폰의 미래를 밝게 보기 시작한 것도 이맘 때였다.

그 예상은 9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전국 10개 시티폰 사업자들이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다며 단체로 사업권을 반납해 버린 것이다. 그해 10월 애초 계획보다 앞당겨 시작된 개인휴대전화(PCS)
서비스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시티폰과 거의 비슷한 요금대에 착·발신과 전국통화가 가능한 서비스 앞에서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안테나가 설치된 공중전화 주변에서만 통화가 되는 `‘먹통 시티폰’은 애초부터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다음해 가입자를 죄다 떠안은 한국통신도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지난달 말 정통부에 시티폰 서비스 중단 승인요청서를 제출했다. 한국통신이 정통부의 승인을 받아 내년 2월 서비스를 전면 중단하면 시티폰은 숱한 오점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엇나간 수요 예측과 잘못된 투자로 한국통신은 사업중단에 따른 후유증을 두고두고 앓게 생겼다.

우선 전국 공중전화 부스에 깔려 있는 4만6천여개의 안테나형 중계기와 전국 60개 전화국에 설치돼 있는 시스템 관리장치의 처리방안이 막막하다. 한국통신은 야외 놀이시설 등 구내 무선통신망을 구축하려는 업체나 외국에 파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재활용 용도가 마땅치 않을 뿐더러 계약이 이뤄 지더라도 투자비에 훨씬 못 미치는 헐값에 팔릴 가능성이 크다.

사업철수에 따른 대리점들의 배상·보상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도 크다. 지난 4월 시티폰 대리점을 운영했던 정모씨는 “한국통신이 위탁대리점 계약을 맺을 당시 광고로 설명한 것과는 달리 시티폰사업에 계속적인 투자를 하지 않아 고객이탈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다”며 1억5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를 포함해 현재 2건의 소송이 진행중이다.

서비스 중단이 현실화하면 전국 1백40개 전속 대리점의 생계보장 요구가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한국통신쪽은 “이들에게 다른 유·무선 상품을 취급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다”고 밝히지만 대리점들이 시티폰 영업 등에 투자한 부분에 대해 집단적으로 보상을 요구해 올 땐 뾰족한 대책이 없어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다.

10월 말 현재 16만명에 이르는 기존 가입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해선 ▶016 PCS 전환 ▶ISDN 등 다른 서비스 상품 제공 ▶현금 보상 등 3가지 보상 방법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한국통신이 이미 몇달 전 내부적으로 시티폰 퇴출방침을 세워 놓고도 발표하지 않았던 것도 보상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한국통신은 발표를 일부러 미룬 채 가입자를 줄여 나가는 `‘고사작전’을 써 온 사실이 드러나 이번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한국통신 관계자는 이에 대해 “보상을 목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해지를 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상당수 된다”며 가입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어찌 됐건, 가입자 가운데 일부라도 계속 시티폰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개별협상을 통한 보상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시티폰 가입비와 보증금, 단말기값 중 일부를 보상해 주기로 한 현금보상의 경우 특판행사 등을 통해 무료 단말기를 지급받고 가입비나 보증금 없이 가입한 사람들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등 대상 기준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그나마 보상액수도 평균 3만원 정도에 불과해 가입자들의 반발만 살 우려가 높다.
한국통신은 이래저래 가입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함석진 한겨레 경제부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economist.joongang.co.kr) 제 512호 1999.11.23.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