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5]본토로 이주한 1천여명도 '인종차별의 벽' 에 시달려

미주중앙

입력

초기이민자들이 하와이에 이민을 올때 타고 온 또다른 이민선 S.S 몽골리아호의 모습

◆ 3년간 1천명 캘리포니아로

"이 농장에서 과일을 다 따면 또 다른 농장으로 옮겨가고 또 옮겨가고 자꾸 옮겨 다녔어요. 100번도 더 옮겼어요. 고생 죽도록 했어요. 말할 수가 없어요…"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수십 군데의 농장을 옮겨가며 일하며생활해 노동이민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용하게도 농장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 나름의 새로운 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농장에서 빠져 나왔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기자가 만난 초기 이민들의 주장은 모두가 달랐다.

어떤 분은 1년만에 본토로 옮겼다고 했고 어떤 분은 3년 뒤에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농장에서 나오는 것은 자유였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 때 그처럼 자유로웠겠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적어도 3년 이내에 농장에서 나온 사람은 '무단 이탈'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와이이민국 자료에 따르면 1905년부터 1907년까지 3년 동안에 본토인 캘리포니아 지방으로 건너간 한국인은 1천 30명으로 돼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봉사회관에서 만난 사람들. 왼쪽부터 저자, 양주은 옹, 그리고 백광선 여사와 도라 김 여사.

◆ 본토에서도 농장일로 생계

노예와 같았던 하와이의 농장을 탈출해서 본토로 건너간 한국인은 '인종차별'이라는 새로운 벽에 부딪혀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었던 백광선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본다.

"동양사람은 농장일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일은 허락이 되질 안해서 하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보니 한국사람들이 하는 일은 오렌지나 레몬을 따고 호도를 줍고 또 과일을 다 딴 다음에는 나무 가지치기하는 일 하고 그저 그런 일이 전부였습니다. 한 5년동안 그런 일밖에는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농장일이 싫어서 떠난 사람들이 또 다시 농장에서 일을 해야했다는 얘기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 심한 차별을 했었을까?

양주은씨는 이러한 인종차별이 일본사람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의 총독인 존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법률을 고쳤어요. 이러다가는 일본사람들에게 이 캘리포니아의 옥토를 다 빼앗기겠다는 주장이 생기면서 새로운 법을 제정했어요. 동양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한국사람 할 것 없이 몰아서 그러나 중국사람은 약간 대우를 해주었어요. 어떻든 일본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학대를 받은 셈이지."

양주은씨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동양인 배척법'이다.

그러나 이같은 차별은 법적인 사실보다는 당시 미국사람들 마음에 깔려있는 근원적인 '차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와이에 먼저 도착한 동포들이 새 이민선이 들어올때 부두에 나가서 환영하고 있다.

◆ 인종차별로 동양인 배척법

이런 차별 때문에 우리 초기 이민들이 받았던 서러움은 많다. 초기의 하와이 이민 모두가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한학이지만 학식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영어에 어느 정도의 자신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좋은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저 노동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있었던 차경신 할머니의 회고다.

"그때는 동양사람은 학사건 박사건 직책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 노동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노동 특히 백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 동양사람이나 흑인들이 그런 일을 했지요. 남편 되는 이가 쿡(요리사)도 하고 별 것 다했지요. 그저 일이라면 다 했지요. 일이라면 뭐라도 해야 사니까…"

여자들 가운데는 요즘의 가정부 같은 일을 했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좋게 말해서 가정부지 사실은 하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쿨 걸 스쿨 걸이라는 것은 그 집에 가서 얻어먹고 자고 아침저녁 상을 놓아주고 저녁 설거지 해주고 그런 일을 했어요. 그 일을 한 주일에 5달러 받고 했어요."

어차피 초기 하와이 이민은 노동이민이었다.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건 공사장에서 노동을 했건 또는 하인이 돼서 일을 했건 노동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에 대한 차별은 그래도 이겨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격적인 모독은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김수권 할아버지의 얘기다.

"일본사람이나 청인(중국사람 청나라 사람의 뜻)이나 한국인이나 동양사람은 모두 종일을 했고 또 못된 놈들은 말이야 거리에서 동양사람을 만날 것 같으면 아무런 이유 없이 때리기도 하고 얼굴을 만지면서 코를 들어올린다든지 입을 찢으려고 한다든지 하여튼 그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들과 달리 이상하니까 그저 개 만지듯이 했지."

◆ 백인들 동양인 구타 추행도

이런 일 때문에 한국인 여자들은 대낮에도 마음 놓고 길거리를 다니지 못했다고 했다. 초기 이민들은 그 당시의 이러한 수모를 되새기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77년 당시 로스앤젤레스에는 KBC(당시 대표 서정자)라는 한국어 방송이 있었다.

이 방송에서 가진 한 인터뷰에서 초기 이민인 이화목씨는 낳은지 며칠 안되는 갓난 아이 때문에 집을 쫓겨났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동양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대단히 나빴어요. 여기서 낳은 큰아이가 많이 우니까 정월 초하룻날 쫓아내더라구요. 애가 운다고요… 더구나 동양사람들에게는 집을 주지 않았어요. 그러니 집을 구할 수가 너무 너무 없어서 남의 집 차고 뒤에 있는 조그마한 것을 하나 얻어 가지고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았지요."

이씨가 '오래 오래 살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살만한 곳이어서 오래 오래 살았다는 순박한 의미가 아니라 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수밖에 없었다는 '한'이 맺힌 표현이다.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지난해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육성증언이 담긴 방송제작분은 JBC중앙방송을 통해서 1월31일(월)부터 2월16일(수)까지 오전9시40분부터 20분간 13회 방송 될 예정이다.

정리=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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