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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부산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관현악단’ 산증인 박불케리아 수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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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부산. 천마산 자락, 얕은 언덕은 소란스러웠다. “있다 아이가, 이 부분은 더 똑똑 끊어서 학실하게 해야 한다.” 바닷가 햇볕에 그을린 소년 수십 명이 악기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하는 첫 서울 공연에서 선보일 ‘운명’ 교향곡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오케스트라 총연습을 마친 아이들은 저마다 방에 모여 악기별 연습을 했다. 한 살이라도 많은 형들은 아래 학년 단원들을 지도했다. 쉴 새 없이 들리는 음표에 땀냄새가 섞였다. 알로이시오 소년의 집 풍경이었다. 갓난아이부터 대학생까지 700여 명이 함께 지낸다. 초·중·고등학교도 같은 곳에 있다. 미국인 알로이시오(본명 알로이시오 슈워츠, 1930~92) 신부가 1969년 전쟁 고아를 위해 지은 시설이다.

글=김호정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24일 서울대 음대 연습실에서 그곳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사흘 후 서울바로크합주단(단장 김민)과 함께하는 신년음악회에서 연주할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교향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새 얼굴이 많이 바뀌었다. 4년 전의 소년들은 장성해 사회로 나갔다. 새롭고 앳된 얼굴들이 보였다. 변화는 빨랐다. 부산 소년의 집 옆 구호병원은 신축공사를 마쳤다.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자선 연주의 모금 결실이다. 지난해 이름도 바꿨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이제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이다. 소리도 달라졌다. 최근에 후원받은 악기로 아이들은 깊어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박불케리아(63) 수녀는 부산 소년의 집에서 40년 동안 이렇게 아이들을 길러 사회에 보냈다. 24일에도 오케스트라 곁을 지켰다. 4년 전 서울 연주를 앞두고 가슴 설레며 “음대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하던 학생 몇이 떠올라 안부를 먼저 물었다. 아픈 대답이 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물어요. 아이들이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전공을 시키면 좋지 않으냐고요. 하지만 겉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저희는 절대 전문 음악인이 되라고 권하지 않아요. 그게 얼마나 고독한데요.”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는 1979년 창단했다. 그동안 많은 이가 ‘부모 없는 소년들의 기적’을 말했다. 불케리아 수녀는 처음부터 단원 매니저 역할을 맡았다. 소년의 집 식구들은 그가 ‘오케스트라의 산 역사’라고 말한다. “좋아 죽겠지 않으면 음악대학 가지 말아라”고 말려도, 악기를 쥐고 소년의 집을 졸업하는 소년이 점점 늘어났다. 말리는 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지금 울산시향에 셋, 부산에 둘, 창원에 하나, 포항에서 한 명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천안시향까지 가서 연주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모 뒷바라지 다 받고, 좋은 악기 들고 연주하는 사람들과 당당히 함께하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했다.

●오케스트라의 창단 멤버들은 이제 장년이 됐겠습니다.

 “그렇죠. 마흔을 훌쩍 넘은 졸업생도 있죠. 지난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했잖아요. 졸업한 오케스트라 단원 숫자를 처음 실감할 수 있었어요. 무대가 워낙 컸으니까,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졸업생들을 찾았거든요. 참, 그런데 희한했어요. 그렇게 연락이 닿아 아직 연주를 하는지 물으면 ‘수녀님, 연주를 그만둘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아이가 많은 거예요. 소년의 집을 떠날 땐 악기도 다 반납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은 첫 월급을 털어서 악기를 다시 샀다네요.”

●지금은 대부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죠?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전자기계 고등학교를 다녀요. 기술을 배워 나가 그쪽 계통에서 일을 많이 하는데, 한 졸업생이 그러더군요. ‘회사에서 축구 시합이 열리면 너도나도 들어가서 공을 찰 수 있지만,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라고요. 그게 아이들에게 큰 힘이에요. 자부심이고 자긍심이죠. 제가 아이들과 생활한 지 40년이 다 됐어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도와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죠.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면 시설을 떠나야 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금전적으로는 많이 도와줄 수가 없어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나아요.”

●요새는 주목을 많이 받아 아이들이 더 자랑스러워 하죠?

 “초창기 선배들이 희생을 많이 한 거예요. 1991년 첫 정기 연주회를 열었어요. 올해로 꼭 20년이죠. 그때 6월이라 장마가 시작돼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자선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3000원짜리 티켓을 우리 수녀님들이 곳곳에 다니면서 팔았어요. 저는 주일마다 아이들을 각 성당 미사에 데려가서 ‘이런 오케스트라도 있습니다’ 선전했고요. 그래도 연주 당일이 되니 손님이 영 없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안 하는 아이들을 대기시켰어요. 손님이 없으면 너희들이라도 자리를 채워라, 그랬죠.”

●결과는요?

 “청중이 꽉 들어차서 아이들은 앉을 데가 없었어요.(웃음)”

●수녀님들이 직접 표를 팔아야 했나요?

 “원래 저희 신부님은 ‘수녀님들은 조용히 봉사하고 조용히 일하라’고 했어요. 찬양하는 목소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악기 선율이라면서 현악기 30대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셨죠. 그런데 89년에 건강이 많이 안 좋아 종합검진을 받았어요. 루게릭병이고, 3년을 못 넘긴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모금이나 홍보 활동은 신부님이 다 했는데, 그 결과를 받고는 이제 수녀님들이 나서야겠다고 하셨죠. 당시 원장 수녀님이 ‘우리가 합주단이 있으니 자선 음악회를 해보자’며 91년 공연을 시작한 거예요. 한번 와본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차츰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 후로 한 해도 빠짐없이 공연을 열었군요.

 “신부님이 그러셨어요. ‘맡은 일을 조용히 하면 길이 열린다’고요. 그래선지 도와주는 분들이 자연스레 생겼어요. 93년 3회 연주를 마쳤을 때 부산 로타리클럽의 김경태 전 총재님이 저희를 찾아오셨어요. 로타리 회합하는 데에서 연주를 한번 해달라고요. 회원들 앞에서 연주를 마치고 총재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아이들이 정말 훌륭하고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나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악기에서 쇳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요. 그때 우리가 최저가 악기를 썼거든요. 바이올린 한 대에 2만원쯤 했을까. 김 총재님은 ‘내가 알아보니 30만원이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지금보다는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로 바꿀 수 있다. 내가 한 대를 해주려 한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도울 의향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라’ 그러셨죠.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대부분의 현악기를 교체했고, 2000년에는 부산 로타리클럽에서 관악기 전부를 바꿔주셨죠.”

●지금도 그 악기를 쓰나요.

 “지난해 카네기홀 다녀오면서 악기 공장을 하시는 분이 현악기를 전부 바꿔줬죠. 그래서 지금은 100만원쯤 하는 악기를 쓰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더 좋은 악기로 바꿔달라고 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제가 그러죠. 선배들은 2만원짜리 악기로도 노력했고,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왔다. 지금 얼마나 좋아진 거냐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좋은 악기 소리를 한 번 들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특히 관악기는 자주 바꿔주는 게 좋은데 말이에요.”

●악기·음악 전문가가 다 되셨겠습니다.

 “(웃으며) 그렇게 됐네요. 그래도 모든 연주 하나하나가 감동적이에요. 볼 때마다 저는 감동을 받아요. 2004년은 특히 잊을 수가 없어요. 전국 청소년 오케스트라 경연대회가 열렸죠. 우리 아이들이 잘하니 나가보자 했는데, 그 대회가 10월 1일이었거든요. 아무래도 고3 학생들의 연주력이 제일 좋은데, 10월은 한창 현장 실습을 나갈 때라 함께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기왕 나가는 거 너희들 상을 타야 되고, 꼭 1등상을 타야 된다’ 그랬어요. 고3 학생들을 설득했죠. 결국 다 왔는데, 우리 바로 앞 순서의 성남청소년교향악단이 정말 잘하는 거예요. 애들이 다 얼어붙고 수군거리고…. 그러다가 딱 올라가서 하는데, 정말 그렇게 하나가 된 모습을 처음 봤어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했거든요. 원래 우리 아이들이 연주 자세도 좀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많이 하질 않아요. 항상 지적을 받았는데, 이 무대에서만큼은 정말 음악에 맞춰 몸을 어찌나 아름답게 움직이던지, 눈물이 나서 혼났어요.”

●말씀대로 1등 했나요?

 “연주가 끝나고 아이들 밥 먹이고 있는데 주최 측에서 전화를 했어요. 대상이라고요. 그때 고3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수녀님, 우리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현장 실습이 중요한데 오케스트라를 꼭 해야 하느냐고요. 근데 결국엔 오케스트라 하기로 하고 상을 못 타면 송도 앞바다에 다 같이 빠지자고 했어요’라고요. 우리 애들 소리가 왜 그렇게 특별한지 잘 알겠죠.”

●시간 맞추기도 힘들 만큼 오케스트라 운영이 만만치 않은 일인데요.

 “사실 반대도 좀 있었어요. 원래는 우리 알로이시오 중·고등학교가 한 반에 60명씩 됐거든요. 근데 아이들이 점점 줄어서 40명 좀 안 돼요. 오케스트라 말고 축구·육상·스키부도 있고요. 그래서 가끔은 한 반에 절반이 빠지는 거예요. 일반 아이들은 부모 밑에서 공부에만 매달리는데, 그 시간까지 빼앗아야 되겠느냐고 반대도 있었죠. 그래도 전 음악을 하는 아이들은 문제가 없다고 믿어요. 다른 학생들 공부 세 시간 할 때 음악 해본 아이들은 한 시간만 해도 돼요. 올해는 저희 시설 안에 힐링 센터를 열 거예요. 아이들을 음악으로 어떻게 치유했는가, 공부에만 전쟁하듯이 매달리지 않아도 훌륭한 인성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다른 학부모들에게도 좀 알려주려고요. 교육학자들과 함께 연구 중입니다.”

●음악이 정말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까요.

 “바꿔요. 자신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거 대단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시향에 들어가 연주하는 걸 보면, 정말로 간절함이 느껴져요.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로 혼자 헤쳐왔을 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또, 운동은 하면서 저절로 스트레스가 풀리지만 음악은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어 힘들어하는 게 보여요. 그래서 또 안쓰러울 때가 있어요.”

●원래 음악을 좋아하셨나요.

 “음악은 누구나 좋아하죠.(웃음) 가끔 사람들이 저한테도 악기를 배우라고 하는데 그림자가 왜 악기를 배워요. 저는 그냥 우리 아이들 가는 데마다 따라다니는 그림자예요.”

j 칵테일 >> ‘대부’ 정명훈 “이 아이들이 이런 소리를 … 영적인 힘”

정명훈(왼쪽)과 사라 장

2005년 지휘자 정명훈이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앞에 섰다. 단원들과 악기를 둘러봤다. “까불이 사내 애들만 가득하고, 악기도 그저 그렇고, 아마 그래서 찬찬히 하나하나 봤을 거예요.” 박불케리아 수녀의 회상이다. 그녀는 연습을 마친 정명훈의 말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아이들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가. 표현할 말이 없지만, 굳이 해야 한다면 영적인 힘이라 하겠다. 그 기운이 아이들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정명훈씨는 이후 이 오케스트라의 ‘대부’가 됐다. 아이들을 서울 무대에 소개했고, 지난해 뉴욕 카네기홀에도 함께 갔다.

 많은 음악가가 이 특별한 소리에 반했다. 부산여대 교수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안유경씨는 30명 현악단으로 출발한 오케스트라의 초창기 지휘를 맡았다. 오케스트라의 산파인 안씨는 경희대 동문인 테너 엄정행씨 등 동료 음악가들을 함께 공연하도록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주자들에게 출연료를 지급하기는 어려웠다. 이때 테너 고(故) 홍춘선씨가 도움을 줬다. 평소 청소년 교향악단 창단을 꿈꿨던 이다. 소년들의 오케스트라는 그의 꿈과 함께 자랐다. 90년대 초반 홍씨는 각 악기를 개인 지도할 수 있는 실력파 음악인들을 데리고 부산에 갔다. 단체로는 배워도 개인 레슨은 받아본 적 없던 아이들의 실력이 그제야 쑥쑥 컸다.

 산파와 스승에 이어 ‘추천인’이 나타났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다. 그는 99년 서울 예술의전당 독주회에서 소년들을 깜짝 소개했다. 앙코르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하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를 무대에 올렸다. 그에 앞서 공연 기획사에 “음악으로 도움을 줄 만한 오케스트라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부산에서 틈틈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결과다. 단원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을 모른 사라 장은 어릴 적 입던 드레스를 가득 싸가지고 부산에 내려가는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래도 나이가 엇비슷한 소년들과 사라 장은 금세 친구가 됐다. 이 무대에서 사라 장과 2중주로 협연 했던 아이는 현재 창원시향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약 중이다.

 현재 오케스트라의 큰 힘은 정명훈씨의 막내 아들 정민씨다. 2007년 이후 정기적으로 부산을 찾아 오케스트라를 훈련시키고 함께 연주한다. 그는 “가진 것을 100% 발휘하는 놀라운 오케스트라”라며 놀라워했다. 연주자들을 부산으로 불러들였던 바로 그 매력이다. 27일 신년 음악회를 함께 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은 “엄청난 정신력이 느껴진다. 이들을 하나로 엮고 있는 무엇이 있는 듯하다”고 했다.

비발디가 협주곡 바친 ‘소녀들의 오케스트라’

2008년 12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남미의 청소년들이 무대에 올랐다. 일반 오케
스트라 1.5배 수준의 규모, 다듬어지지 않은 생생한 열정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을 들려줬다. 앙코르 곡에 이르자 단원들은 의자에 올라가 춤을 췄다.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는 이렇게 우리에게 충격을 남겼다. 이들을 길러낸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국가적 음악 교육 프로그램이다. 전국에 지역 센터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친다. 폭력과 마약에 익숙한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쥐어줬다. 1975년, 한 공장의 창고에서 음악가 8명이 모여 시작했다. ‘엘 시스테마’를거쳐간 사람은 약 30만 명에 이른다.

하도 유명해 ‘팝 클래식’이라 불리는 곡이 있다.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의 ‘사계’다. 대중교통, 통화 연결음 등으로 쓰일 만큼 인기가 많아 다양한 편곡 버전이 있다. 하지만 1723년의 원곡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이 주인공이고 그 뒤로 10여 명의 현악기 연주자가 있다. 한 대의 건반악기도 동원된다.

 비발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이 같은 협주곡을 수백 곡 썼다. ‘소녀들의 오케스트라’에 줄 곡이었다. 비발디는 20대 중반부터 40여 년을 보육원에서 보냈다. 부모를 잃었거나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소녀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의 음악선생이자 지휘자, 상임 작곡가였다. 악기와 노래를 가르쳤다.

 비발디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종교음악을 작곡해 성당에서 연주했다. 오페라를 작곡하면 베네치아와 오스트리아 빈 등에서 공연됐을 정도로 성공한 작곡가였다. 스스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관심사는 ‘사계’처럼 새롭고 신비한 음악의 세계를 소녀들에게 보여주는 데 있었다. 비발디는 봄·여름·가을·겨울의 표제에 직접 시를 지어 붙여 이들에게 선사했다. 무엇보다 협주곡은 최대한 많은 인원을 참여시킬 수 있는 양식이었다.

 아이들과 음악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곧 베네치아의 명물이 됐고, 빨간 머리 사제 비발디도 더욱 유명세를 얻었다. 몇 명의 프로 연주자도 배출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공연을 보고 감상평을 남겼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부산에서 베네치아가 떠오르는 것은 비발디 때문이다. 두 곳 모두 혼자 된 아이들이 음악을 선물로 받고 함께 모여 연주했다. 더 멀게는 남미의 베네수엘라까지 가기도 한다. 마약과 범죄가 들끓던 베네수엘라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창단과 비슷한 시기인 1975년 ‘엘 시스테마’라는 전국적 음악교육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엘 시스테마’는 단순히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프로젝트도 단순했다. 방과 후 아이들을 모아 악기를 가르치고, 각 지역에서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실력이 좋은 아이들은 수도 카라카스의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 즉 올스타 팀으로 뽑혀갔다. 세계 주요 공연장을 돌며 연주하는 전문 악단으로 성장했다. 베네수엘라에선 현재 약 28만 명의 아이가 오케스트라 악기를 배우고 있다.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28세에 맡은 ‘괴물’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바로 이 시스템 출신이다.

 2008년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을 때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 70명이 공연에 초청되기도 했다. 함께 한국에 왔던 ‘엘 시스테마’의 창시자 호세 아브레우 박사는 “부산의 스토리를 들으니 우리와 매우 닮았다”고 평했다. 단원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 가르치고 배우는 선후배 문화, 축제 같은 연주 분위기에 대한 감상이었다.

 이처럼 부산은 베네치아와 베네수엘라의 중간쯤에 있다. 아이들의 사연은 베네치아에 가깝지만 오케스트라 분위기는 베네수엘라와 비슷하다. 또는 통합형 신모델이다. 한국 특유의 정서가 더해져 연주자·관객의 ‘나눔’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사춘기 아이들의 행보에 음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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