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순 5집

중앙일보

입력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아티스트로 대접 받을 만한 여성 뮤지션은 그리 많지 않다. 포크 음악의 원조로 존경 받는 양희은 조차도 70년대의 김민기, 이주원, 80년대의 하덕규(시인과 촌장), 90년대의 이병우(어떤날)라는 조력자가 없었다면 현재의 평가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의 사견이지만, 90년대를 접는 지금 한영애, 이상은, 김윤아(자우림)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두드러지는 여성 아티스트를 발견하기 힘들다. 물론 여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TV를 중심으로 시각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현재의 왜곡된 대중 음악의 흐름이 역량있는 여성 뮤지션의 등장을 막는 주된 요인일 것이다.

많은 가수들의 음반작업에 코러스로 참여해 알려진 장필순 역시 불과 몇해 전 만하더라도 그냥 노래 잘하는 '가수' 중 한사람이었을 뿐이다. 여성 듀엣 소리 두울을 시작으로 1989년작 영화 '굿모닝 대통령'에 삽입된 '내일이 찾아오면'(오석준, 박정운 노래)의 히트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장필순은 김현철의 프로듀스로 제작된 1집(1990년)에서 〈어느새〉의 히트로 한때 퓨젼-특히 보사노바-의 새로운 기수로 주목 받았었지만 역시 그녀 음악의 원류는 포크 였다.

정원영, 조동익 등이 참여한 1992년 3집〈강남 어린이〉(정원영 작곡)부터 자신의 색깔을 찾기 시작한 장필순은 예전 곡들을 다시 녹음한 〈Best Collection〉(1993년), 1995년에 발표한 셀프 타이틀 4집, 그리고 최고 역작이라고 평가 받아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본작을 통해 그녀는 이제 아티스트로서의 홀로서기에 성공한 듯 싶다. 물론 전체적인 음반의 프로듀스와 편곡을 담당한 조동익의 도움이 아직까지 컸다는 것을 무시할 순 없지만 '하루'('어떤날'의 원곡), '상상해 보셨나요' 등이 주목 받았던 4집에 비해 장필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앨범 서포트를 맡고 있는 조동익 밴드의 연주 또한 안치환 4집(1995년), 김광석 4집(1994년)등과 더불어 그동안의 세션 경력 중 정점을 보여준 진정한 마스터피스이다. 다분히 방송을 의식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의 '첫사랑', '너의 외로움이 널 부를때' 등 2곡(무산되긴 했지만 당시 계획했던 '언플러그드'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다.)을 제외하곤 모든 곡에서 박용준의 키보드를 배제한 채 단순히 기타, 베이스, 드럼이란 기본 편성만으로 직선적인 느낌의 포크 록+모던 록을 연주하는 과감성을 보여주고 있다.(특히, 국내 세션 기타리스트 중 자신만의 소리를 잘 만드는 함춘호는 외국 유명 모던 록 그룹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안정감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조동익과 윤영배의 좋은 곡과 함께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래', '사랑해봐도'를 통해 선보인 그녀의 곡 쓰기 또한 원숙함을 더하고 있다. 현대인의 단조로운 일상을 특유의 가사로 표현한 'TV, 돼지, 벌레'(조동익 곡)과 프렛리스 베이스와 어쿠스틱 기타 반주만으로 진한 울림을 전달하는 '이곳에 오면', 솔로 음반이 기대되는 미완의 대기 윤영배 (기타, 작곡)가 만든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는 음반의 백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