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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64> 북한 신년 공동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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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북한 문제를 담당하는 우리 당국자나 전문가들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1월 1일을 매우 바쁘게 보냅니다. 북한의 신년사라고 할 수 있는 3개 신문 신년 공동사설이 이날 오전 발표되기 때문이지요. 신년 공동사설에는 북한 지도부의 한 해 국정 구상과 정책 목표가 녹아 있습니다. 대내외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지요. 우리 대통령의 신년 연설과 비슷한 성격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은 우리 대통령의 새해 연설과 형식·내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북한 신년 공동사설을 분석해 봤습니다.

정용수 기자

3개 신문에 같은 사설 싣고 관영TV로 보도

북한은 1995년 이래 해마다 1월 1일 노동당 기관지(노동신문), 군 기관지(조선인민군),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기관지(청년전위)에 신년 공동사설을 싣고 관영 TV로 보도한다. 북한은 이를 통해 한 해 정책 추진 목표와 과제를 내놓는다. 그 전해에 진행해 왔던 정책의 완성과 독려도 포함한다. 북한 당·정·군은 이를 기준으로 한 해 업무계획을 세우고 목표 달성을 다짐한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005년 1월 21일 “95년부터 해마다 발표되는 공동사설은 (김정일의) 신년사와 같은 사회주의 정강”이라고 보도했다. 공동사설이 곧 김정일의 신년사인 셈이다.

북한 주민들 외울 정도로 학습해야

평양 주민들이 지난 3일 김일성 광장에서 신년 공동사설 관철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북한 언론들은 이날 10만여 명의 주민들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 주민들은 신년에 직장에 모여 공동사설을 함께 읽는다. 전날 술을 마셨더라도 정장을 하고 참가해야 한다고 한다. 공동사설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북한 주민들은 1만여 자(원고지 50장)에 이르는 공동사설을 외워야 할 정도로 학습해야 한다. 공동사설이 발표된 뒤 처음 맞는 토요일엔 직장·지역별 당비서들이 주민들의 학습 상태를 점검한다. 노동당은 공동사설을 자세히 설명한 해설집을 배포하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도 한다. 공동사설을 보다 구체화한 세부 내용이 하달되는 것이다. 또 주민들은 직장·지역별로 수시로 모여 공동사설 관철 궐기대회를 열기도 한다. TV와 신문 등 언론들도 ‘올해의 공동사설 중에서’란 코너를 만들어 공동사설 내용을 분야별로 정리해 주민들에게 전한다. 연말이 되면 공동사설에서 제시한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점검하고 목표 달성을 독려하기도 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경제 분야 제목으로 제시

공동사설 관철을 독려하기 위해 평양 곳곳에 붙인 포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올해 북한 신년 공동사설의 제목은 ‘올해에 다시한번 경공업에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 향상과 강성대국 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자’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100주년 생일을 맞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로 규정하고 있다. 김정일이 집권한 95년 이후 인민생활 향상 등 경제 분야를 신년사 제목으로 제시한 것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2012년을 맞아 주민들의 생활 여건을 올려 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는 북한의 경제 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정은 후계체제의 안착을 위해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필요도 있다.

김일성 사망 직후 북한은 공동사설(95~98년) 제목에 당의 영도와 붉은 기 사상, 체제 결속을 강조했다. 아사자가 속출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넘으려는 김정일의 고육지책이었다. 2000년 이후에는 새로운 세기, 선군(先軍), 강성대국을 적절히 조합하며 경제 회복을 위한 ‘돌격전’을 내세웠다. 공동사설에 북한이 처한 상황이 투영되고 있는 셈이다.

“당의 사상은 공격사상” 천안함 폭침 암시도

신년 공동사설 내용은 시기와 관계없이 순서가 정해져 있다. 제일 먼저 지난해 성과를 평가한다. 올해 공동사설에서는 “강성번영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경이적 사변들이 다계단으로 일어난 거창한 변혁의 해였다”고 강조했다. “우리 당의 사상은 공격사상이며 당의 혁명방식도 공격방식”이라고 밝혀 지난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암시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지난해 두 차례에 걸친 중국 방문을 공동사설에 밝히며 북·중 친선 성과도 강조했다. 공동사설은 전년도 평가 부분에서 “경이적 사변이 일어난 한 해였다”고 해 주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일쑤다.

전년도 평가에 이어 경제·정치의 내정, 대남, 대외 순서로 목표와 과제를 제시한다. 경제 부문에서 올해 공동사설은 경공업을 ‘주공 전선’으로 설정했다. 화학공업 생산 정상화와 농업 생산의 변혁으로 식량 생산 증대도 강조했다. 입고 먹는 문제 해결을 통해 인민생활 향상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당의 영도적 역할과 인민 군대의 전투적 위력 강화도 주문했다. 특히 올해 공동사설은 이전과 달리 당대표자회(지난해 9월 28일) 정신을 강조하고 나섰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된 행사를 강조함으로써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겠다는 점을 암시했다.

대남 부문에서는 (남북) 대결상태를 해소하고 2000년, 2007년의 1, 2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을 우리 정부에 요구했다. 남북 간 대화와 협력 분위기 조성에도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대외관계와 관련해선 동북아 평화,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의지는 변함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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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말 20~30명으로 작성팀 구성

해마다 10월 말이 되면 다음 해 공동사설 작성을 위한 ‘상무조(태스크포스)’가 꾸려진다. 노동당 서기실(비서실)과 조직지도부·선전선동부 고위 간부와 실무자들이 참가한다고 한다. 통상 20~3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당에서 정해 준 다음 해 정책 목표를 작성한다. 주변 정세 분석자료와 당의 정책자료도 참고해 초안을 만든다. 작성된 초안으로 수차례 회의를 열어 당 정책이 제대로 반영됐는지, 정세 분석이 제대로 투영됐는지 등을 논의한다. 그리고 발표 전까지 퇴고를 거듭해 김정일의 재가를 받아 언론사에 전달한다. 그러나 지난 연말처럼 남북 간에 긴박한 정세가 계속되거나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 마지막까지 원고를 고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공동사설 내용은 상무조에서 작성하지만 제목만큼은 김정일이 직접 정한다고 한다. 노동신문은 2000년 1월 29일의 ‘정론’에서 “지난해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동사설의 문장과 표현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지도하고 해당 일꾼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사설의 제목을 완성하였다”고 전했다.

김일성 생전엔 1월 1일 신년사 발표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은 생전의 김일성이 발표하던 신년사를 대체한 것이다. 김일성의 신년사는 북한 정부가 수립(48년 9월 9일)되기 이전인 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월 1일 0시 김일성은 ‘신년을 맞으면서 전국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김일성은 이 첫 신년사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자격으로 발표했다. 새해 인사와 더불어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A4 용지 2장 남짓한 분량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년사는 최고지도자의 교시가 됐고 분량도 늘어났다.

김일성은 생전 신년사 발표에 앞서 12월 31일 자신의 집무실인 금수산의사당(현 금수산기념궁전)에서 당 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연합회의를 열어 신년사 내용을 정리하고 1월 1일 오전 9시 TV와 라디오 생중계를 통해 신년사를 발표한다. 94년 신년사 연설은 40분여 동안 진행됐다.

‘종파사건’ 등 격랑기엔 신년사 생략도

김일성의 신년사가 늘 같은 형식을 취한 것은 아니다. 6·25전쟁 중이던 52년과 53년에는 북한군 장병들에게 보내는 최고사령관의 ‘축하문’ 형식으로 발표했다. 54년과 55년, 59년에는 신년 축하연회 때 연설로 대체하기도 했다. 57년과 66~70년은 신년사 발표가 생략됐다. 57년의 경우 전년도에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계열과 연안파의 정치적 갈등인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해 정국이 어수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60년대 후반 신년사를 발표하지 못한 것은 2차 7개년 계획이 실패해 경제적 성과를 내세울 수 없었고, 중·소 갈등을 겪었던 점 등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치적 격랑기에는 신년사가 생략된 것이다.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에는 김정일이 직접 발표하지 않고 노동신문·조선인민군·청년전위의 공동사설 형식으로 발표되고 있다. 다만 98년 신년 공동사설은 노동신문과 조선인민군에만 발표됐다. 97년 ‘주니어 노동당’으로 불리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고위 간부들이 비리에 연루돼 조사받고 좌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단체의 기관지인 청년전위를 제외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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