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의식 직시한 신랄한 시선으로 삶의 알맹이 드러내

중앙선데이

입력

시인 김지하(오른쪽)씨가 아내 김영주씨와 함께 소설가 박완서 선생 빈소를 찾았다. 소설가 박경리선생의 딸인 김영주씨는 현재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최정동 기자

한국문학의 큰 별, 소설가 박완서씨가 22일 오전 6시17분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별세했다. 담낭암 투병 중이었다. 80세.

선생은 영원한 현역이었다. 그의 사전에 조로(早老)라는 낱말은 없었다.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늦깎이 등단한 이래 누구보다 왕성하게 작품을 썼다. 문학적으로 빛나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톡톡히 받았다. 문학평론가 이경호는 그의 문학 이력을 가리켜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업적을 이룩했다”고 표현했다.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는 지난해 7월 자신의 근황과 주변, 삶과 인생에 대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자택을 찾았을 때 그는 “연애소설은 모든 소설가의 꿈”이라며 멋진 연애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을 비추기도 했다.

댓잎처럼 새파란 현역정신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마를 이겨내는 듯했다. 지난해 9월 발병, 10월 초순에 수술을 받은 후 경과가 좋아 셋째 사위가 의사로 있는 서울 삼성의료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최근에는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심사를 맡기도 했다. 세상을 떠나던 날이 공교롭게도 심사일이었다. 그는 심사 장소에 나갈 수는 없어도 전화로 의견을 밝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날 새벽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끝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그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글쓰기 철학을 가진 현실주의자였다. 흔히 그의 글쓰기는 ‘복수(復讐)로서의 글쓰기’로 표현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뎌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이런 복수심 때문에 마음만이라도 벌레가 되지 않고 최소한의 자존심이나마 지킬 수 있었다. 문학에도 이런 힘이 있구나….”

생전 그가 밝힌 소설을 쓰게 된 이유다.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참혹한 전쟁 체험, 이를 언젠가는 글로써 까발리겠다는 앙심(怏心)이 소설을 쓰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전쟁 통에 오빠를 잃은 상실감, 아들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는 어머니를 고스란히 지켜본 경험은 그의 문학의 자양분이자 수원지였다.

그는 1931년 지금은 북한 땅인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올케와 함께 북으로 끌려가던 그는 “임진강은 절대로 건너선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고는 극적으로 탈출한다. 생쌀을 씹으며 돌아온 서울은 처참했다. 전쟁의 주도권이 바뀌며 남북 양측의 사찰요원들로부터 번갈아 수모를 겪어야 했고 오빠는 죽어간다. 이때의 전쟁 체험을 녹인 게 대표작 장편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다. 중편인 ‘엄마의 말뚝’ 1·2 연작,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등단작 ‘나목’ 등도 역시 전쟁 체험이 바탕이 된 작품들이다.

그도 자신의 어머니처럼 아들을 잃었다. 생때같던 막내 외아들(호원태)이 8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잘생긴 아들이었다. ‘대를 잇는 참척’이라는 기구한 경험은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같은 작품으로 나타났다. 80년대 학생운동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담긴 작품이다. 크나큰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된 어머니 모티프의 변주다.

한국전쟁 계열의 작품들이 현대사의 어두운 음화(陰畵)라면, 또 다른 한 축은 보다 대중의 입맛을 염두에 둔 이른바 세태소설이었다. 신문에 연재했던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가 대표적이다. 초희라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마담 뚜의 소개로 부유하지만 아이가 둘 딸린 50대 남성과 결혼하는 얘기를 통해 그는 배금주의, 탈선 행각 같은 세태를 꼬집는다. 한데 그 시선의 신랄함은 작가로서 스스로의 허위의식까지 문제 삼는 철저한 것이었다. ‘사납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랄한 시선을 통해 삶의 진상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글쓰기 전략이었다. 흉하디 흉하고 쓰디쓴 인간의 본성, 삶의 알맹이를 드러내는 글쓰기. 평론가 김수이는 독자들이 그런 박완서 소설을 읽을 때 “피학적이며 가학적인 쾌감에 전율하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졌다.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박완서 선생이 수백만원씩 도와주는 바람에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또 “88년 출판사 창비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되살려 내라며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 황순원·이호철씨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갖다 냈다”고 했다.

그 자신 한국전쟁에 의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거덜 나 이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넌더리를 냈던 터라 이런 그의 행보는 의외다. 그만큼 균형감각을 가지고 현실과 사회를 고민했기 때문일 게다. 말년까지 긴장감 넘치는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하는 후배들에게 본을 보였던 문단의 거목(巨木)이자 큰 어른. 그를 보내는 후배들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해서 그의 장례식은 문학인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한국작가회의·한국문인협회·한국펜클럽 등 좌·우 문학 단체가 함께 치르는 범문단장이다. 2003년 이문구, 2008년 박경리 선생이 갔던 길이다. 육신의 허물을 벗고 미망과 욕망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나는 길이다.

그는 황순원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2006년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 오전.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유족으로 장녀 호원숙(작가)·차녀 원순·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사녀 원균씨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김광하(도이상사 대표)·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김장섭(대구대 교수) 씨 등이 있다. 02-3410-6916.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