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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가정교육이 힘이다 < 하 > 아이가 달라졌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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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인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가정에서 부모가 열린 자세로 아이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 청소년과 그들의 부모가 서로에게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황정옥 기자]

“정말 우리 아이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자녀 문제로 청소년상담센터나 신경정신과를 방문한 부모들은 반신반의하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전문가들의 답변은 “그렇다”이다.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 김지민 상담사는 “소위 문제아로 낙인 찍힌 청소년들도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제발 나 좀 돌봐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녀가 아무리 거칠게 굴어도 부모가 ‘내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약한 아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글=박형수·설승은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친구 관계·성적 하락 등 압박 받는 아이 위로를

신수호(가명·서울 S중 2)군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가슴속에 가득했다. 엄마가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학교 가라”는 식의 이야기만 해도 쌍심지 선 눈으로 “XXX야,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욕설을 퍼붓곤 했다.

엄마는 수호가 돌이 되기도 전에 이혼을 했고, 지금까지 줄곧 직장에 다니며 생계를 책임져 왔다. 엄마의 눈에는 수호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말수가 적다 뿐이지 공부도 잘하고 생활에도 별 문제가 없던 착한 아들이었다. 가끔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인터넷 게임을 하는 게 걸리긴 했지만 엄마도 생업에 바쁘니 “얼른 자라”고만 얘기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수호의 학교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거의 매일 아침 등교하는 척만 하고 학교 주변을 배회하다 엄마가 출근한 뒤에 집에 돌아왔다. 학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게 이유였다. 교실에 들어가면 친구들이 자신만 쳐다보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생활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같은 반 친구와 심하게 싸운 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으로 숨어들어서 인터넷 게임에 파묻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엄마는 수호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자 심한 충격에 빠졌다. 그는 “혼자 얼마나 고생하며 저를 키웠는데…. 어떻게 저런 험한 소리를 하나 배신감이 든다”고 털어놨다.

인터넷 중독이 원인이라고 생각한 엄마는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에 상담을 의뢰했다. 3개월여의 상담이 이어졌다. 그런데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됐다. 상담사 김씨는 “수호의 마음속은 엄마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했다. “아빠의 부재, 어긋난 친구 관계, 떨어지는 성적 등 수호를 짓누르는 여러 상황에 대해 엄마가 무신경했던 부분은 인정하셔야 해요. 아이는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다 그게 불만이 되고 분노로 폭발한 거죠.”

김씨의 지적에 엄마가 수긍을 했다. “나도 피곤하고 지쳐서, 저 혼자 잘 커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수호의 손을 꼭 잡고 “엄마는 네가 워낙 잘해줘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어. 네 마음 몰랐던 거 정말 미안해”라고 말하자 수호는 한참 동안 굵은 눈물을 쏟았다. 모자 사이는 급속하게 회복됐다. 수호는 “엄마가 고생한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닌데 그냥 모든 게 싫었다”며 “지금은 엄마가 안쓰러워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학교 생활도 안정됐다.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됐고 교사에게도 달라진 태도를 보여 인정을 받았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성적도 급상승했다. “기말고사 성적은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어요. 중간고사 때 30등 밖이었거던요. 교장실까지 불려가서 칭찬받고 완전히 난리 났었죠.”(웃음)

상담 센터와 연계 … 부모 교육 등 9개월 간 치유

김용건(가명·K중 3)군은 패륜아로 악명이 높았다.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칼을 들고 부모를 위협하며 난동을 부리는 통에 경찰까지 출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나뿐인 동생도 걸핏하면 때렸다. 빼도 박도 못할 패륜아 같지만, 가족의 이면을 보면 용건이만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해왔고, 어머니는 과도한 지출로 2000만원이 넘는 카드 빚과 사채를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려고 사소한 일에도 거짓말을 하는 게 습관이었다. 용건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존재고, 엄마는 너무 비겁한 사람이었다.

상황이 심각했던 만큼 지역의 상담센터와 정신병원이 연계해 9개월 동안 치유가 이뤄졌다. 부모 교육·문화 활동·분노 다스리기 훈련 등이 이어졌다. 부모 교육을 먼저 한 건 용건이 문제가 부모의 잘못된 양육 태도에서 기인한 바가 컸기 때문이다. 아이 혼자 노력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 전체가 바뀌는 게 급선무였다.

한번 화가 나면 극단으로 치닫는 용건이의 분노도 훈련을 통해 가라앉았다. 화가 났을 때 폭력적인 행동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할 수 있는 노하우들을 알게 된 덕분이다. 특히 ‘감정 주장 훈련’이 효과적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가 어떻다”는 문장 구조에 대입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자꾸 이야기해보도록 시켰다. “엄마가 또 거짓말을 하니 나는 더 듣기가 싫어 죽고 싶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와서 횡설수설하니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게 없다”는 식으로 말로 표현하자 화가 한풀 꺾이고 폭력적인 행동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9개월이 지나자 용건이의 행동은 눈에 띄게 안정됐다. 가족에게 상소리를 하거나 주먹다짐을 하는 일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아침에 10시가 넘어서 일어나 밥 달라고 행패 부리던 녀석이 지금은 자기가 밥을 차려놓고 나더러 먹으라고 한다”고 감격스러워했다. “한참 난동을 부릴 때는 ‘너 죽고 나 죽자’는 마음이 컸죠. 지금은 내가 아비 노릇을 잘못한 탓에 애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겠나 싶어 면목이 없습니다. 용건이에게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으렵니다.”

[전문가들의 진단과 조언] 아이 마음 속 얘기 풀어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모교육전문가 송지희씨는 “사춘기 아이들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동기 때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쌓인 불만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체가 자라고 물리적인 힘이 세지면서 그동안 억눌러 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키게 된다는 말이다. 송씨는 “폭발하는 아이를 나무라고 억누를 게 아니라 마음 속 응축된 이야기를 다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 이윤조 팀장은 “위기를 기회로 보라”며 “문제가 드러났을 때, 부모가 자신의 양육태도를 점검하고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올라올 때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뭐든 부모 탓으로 돌리며 불만을 내뱉는 아이를 보면 손이 저절로 올라간다는 말이다. 사는기쁨신경정신과 김현수 원장은 “청소년 자녀가 뭐든 남 탓으로 돌리며 짜증을 내는 건 두뇌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엔 고등 정신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전두엽은 긴장과 분노를 조절하고 사회성과 관련된 사고를 관장하는 곳이다. 이 부분이 아직 미성숙한 청소년기에는 분노에 대한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거나, 화를 조절하고 남을 배려해 행동하는 게 어렵다는 말이다. 김 원장은 “발달 단계상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원망이나 반항을 할 수 있는 시기임을 알아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매로 다스리려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강지원 변호사는 매스컴의 선정성과 폭력성에 대해 지적했다. 강 변호사는 “TV 드라마의 경우 15, 19세 등 시청자 연령 제한 제도가 실시되고 있지만 이에 따라 시청 지도를 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방송사는 전 연령대가 시청한다고 전제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문용린(교육학과) 교수는 “아이 앞에서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반항을 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반항에 부모가 ‘욱’ 하는 마음으로 욕을 하거나 때리면, 자녀는 부모의 감정적인 대응 방식을 그대로 학습하게 된다. 문 교수는 “부모가 진심으로 자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야 자녀도 부모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가나다 순)
강지원 변호사
김현수 사는기쁨신경정신과 원장
문용린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송지희 부모교육전문가
이윤조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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