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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에는 겨울 공사장, 함바집은 노동자들의 천국이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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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04면

연일 폭설이다. 아전인수 격이지만, 한 나무 밑에서 사흘을 머물지 말라, 불가의 가르침이다. 어쩌다 보니 바다가 보이는 소도시에서 살아온 지 이십 년이 넘었다. 직업상 일 년에 서너 차례 서울 간다. 한때 서울 생각하면서 가슴 설렌 적 많았다. 지금은 고통덩어리다. 아예 발길을 끊을까 생각 중이다. 서울은 욕망의 거대한 삼각파도가 몰아치는 곳이다. 그 파도에 휩쓸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세계 최고를 향해 솟아오르는 바벨탑처럼 고층빌딩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그러나 재개발을 앞둔 산동네에는 함바집이 있다. 거기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소하는 할머니의 절규가 함박눈처럼 쏟아진다.

얼마 전 일이다. 터미널에서 표를 끊어 개찰구로 향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어떤 시선이 나를 그쪽으로 잡아당긴다. 어어, 상흠이형이다.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강산이 훌쩍 변해버린 그곳에 형은 십 년 전처럼 한결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황토색 작업화, 코르덴 바지, 군청색 잠바…. 많이도 상했구나. 십 년 전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당시 형은 우리 목수팀 중에서 피부가 가장 곱고 선량한 눈매를 가진 사나이였다. 젊었을 때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했던 형은 흑백 텔레비전 전성시대에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 좋은 형은 가까운 친척 보증을 섰고, 친척은 망했고, 빚만 고스란히 남았다. 견디다 못한 형수는 밤 보따리를 싸 집을 나갔다. 형은 그때부터 아이 둘을 키우며 건설현장 목수일을 했다. 일 없는 겨울에는 전기, 미장, 도배공사까지 했다.

“형,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시절내가 왜 믈러, 하마, 고릴라 아닌개벼.”
눈은 웃고 있었지만 핏줄 도드라진 눈자위에는 습기가 어린다. 서둘러 동부시장 옆 골목집으로 모셨다. 머릿고기와 막걸리를 시킨다. 연거푸 잔을 채운다. 형은 공치는 날엔 온종일 터미널 대합실에 나와 추위를 녹인다고 했다. 옛날 동료 만나면 당진집이나 홍성집에서 한 잔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 밥은? 차마 묻지 못했다. 현장에서도 밥보다 소주를 먼저 챙기는 형이었다. 어디서 넘어졌는가, 광대뼈는 깎이고 손가락은 퉁퉁 부었다.

“형,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몇 장의 지폐를 쥐여드리고 급히 차에 올랐다. 아아, 그때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던가.

십 년 전 우리 집에서 아파트 신축현장 양대리까지는 편도 4.2㎞ 거리였다. 그 길을 새벽에 일어나서 걸었다. 혹한기에는 공사를 쉬는 법인데 대기업 건설현장 아파트는 공사를 강행했다. 일명 조져먹기(도급제)였다. 오야지(팀장)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손발 잘 맞는 인천, 광주팀들이 일찌감치 슬라브 한 층을 끝내고 함바집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우리 팀은 캄캄할 때까지 끙끙 앓았다. 내복 위에 신문지를 두르고, 두 겹 세 겹 껴 입었으나 칼날 바람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때 상흠이형은 우리 팀 좌장이었다. 우리 일은 못대가리가 보이지 않을 때쯤 끝났다. 3×6 패널로 지은 함바집, 김이 설설 피어오르던 국밥이 눈에 선하다. 화가 난 듯 말 한마디 없던 동료들은 코털에 이슬이 맺힌 채 언 핏줄 속으로 소주를 들이부었다. 소주는 백사장에 바닷물 스며들듯 모세혈관까지 천천히 퍼져나갔다.

겨울 공사장에서는 함바집이 천국이다. 상흠이형처럼 막판에 몰린 사람들, 목숨을 담보로 추위를 견딘 일꾼들은 함바가 없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겨울잠을 잘 수 없으니, 먹이사냥을 나갈 수밖에 없다. 당장 일하지 않으면 굴속에서 기다리는 새끼들이 굶어 죽는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서 뼛심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모두 사기다. 인생보다 더 나은 영화(映畵)는 없으며 르포를 뛰어넘는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문학은 그런 현실을 부지런히 그려 왔다. 생각해 보면 우리 문학에서 함바집은 자주 다뤄졌다. 소설가로는 현기영, 조세희, 이문구, 황석영, 김소진, 정화진, 한창훈 같은 이름들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시인 중에는 신경림, 김신용, 이면우, 백무산, 박영근, 박노해, 최종천, 서정홍 같은 이름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특히 시인 김해화와 김기홍은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지금까지 현장을 지키고 있다. 누구는 전표를 팔고, 누구는 지문이 닳아 없어지고, 누구는 피를 팔아 연명을 해야 할 정도로 노동현장은 가혹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학과 노동을 겸해 왔던 선배 문인 몇 명은 이미 눈 덮인 비탈에 묻혔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인 노동자들은 사회의 최약자다. 함바집에서 그들은 밥값까지 착취되기 일쑤다. 일제 식민지와 동족상잔의 전쟁, 군사독재,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이 된 오늘날에도 함바집은 여전히 복마전의 한복판에 있는 듯하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저 무한질주는 어디서 왔을까.

성경에서도 낙타는 절대로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다고 했다. 적반하장, 안하무인의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허가 함바집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지금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보다 더 무서운 쓰나미다.

버스가 어느새 서해대교를 넘는다. 상흠이형은 아직까지 골목집에 앉아 있을까.
서산남부농협 현장에서였나. 하루는 주위가 시끄러웠다. 예덕리 장씨와 수룡리 병구형이 시비가 붙었다. 시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김대중이 간첩인가 아닌가로 입씨름을 했다. 서로 멱살을 잡는 사생결단식 싸움으로 번졌다. 급기야 예덕리 아저씨가 못주머니를 내팽개치고 사라졌다. 분이 덜 풀린 병구형이 애꿎은 내게 화풀이했다. 자네는 주스도 해태 거로만 마신다지, 아이스크림은 뭘로 먹나. 나는 재빨리 백석의 시를 생각했다. 격렬한 분노보다, 씁쓸한 자괴가 거품처럼 떠올랐다. 나는 장빠루를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때, 계단 옆에서 꿀잠을 자던 상흠이형이 가래침을 멀리 뱉었다.

“예라이, 시절 같은 늠들아! 예라이, 가이새끼보다 못한 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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