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FIFA 부회장의 낙마, 위기가 기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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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호 14면

1993년 1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은 정몽준은 같은 해 1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본선 조추첨식에 참석했다. 행사가 끝난 후 만찬장에서 정 회장과 이홍구 2002 월드컵 유치위원장에게 배정된 자리는 문을 열 때마다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말석이었다. 반면 일본 대표는 기모노를 입은 부인과 함께 메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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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축구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딱 그 정도였다. 정몽준이 아니었다면 2002 한·일 월드컵이 아니라 2002 일본 월드컵이 열렸을 것이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5선에 실패했다. 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총회 FIFA 부회장 선거에서 20표를 얻는 데 그쳐 25표를 획득한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5표 차로 패했다. 1994년 FIFA 부회장에 당선된 이후 경쟁자 없이 내리 4선에 성공했던 정 부회장은 선거에 패하며 FIFA 부회장과 집행위원 자격을 모두 잃었다.

정 명예회장은 “이슬람권 국가들은 단결한 반면 인접 국가부터 우리를 지지하는 나라가 많지 않았다”며 “인접국부터 신뢰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정몽준 캠프에서는 “선거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다”며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이 잠재적 경쟁자인 정 명예회장을 밀어내기 위해 후세인 요르단 왕자를 지지한 점도 결정적 패인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6월 열리는 FIFA 회장 선거에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고 했지만 당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국은 메인 테이블에서 출입구 앞 말석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위기야말로 껍질을 깨고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축구는 정몽준이라는 거대한 온실 속에서 성장해 왔다. 정 명예회장의 낙마는 온실 밖에서도 생존력을 키워야 할 때가 왔다는 경고 사이렌이다.

축구 외교에서는 아래서부터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박지성·이청용 등 축구 선수만 해외 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다. 축구인들도 행정력을 키워 AFC, FIFA 등 국제축구기구에서 일하는 인재가 많아져야 한다. 그게 한국 축구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정 명예회장도 “김주성 대한축구협회 국제국장은 행정가로 열심히 공부했다. 홍명보 감독도 능력이 있다. AFC와 FIFA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축구 외교 분야에 진출하도록 돕겠다”며 인재 양성에 소홀했던 점을 뼈아파했다.

국내 축구도 자생력을 더 키워야 한다. 정 명예회장은 프로클럽 울산 현대, 실업축구 현대 미포조선, 울산대(남자)와 울산과학대(여자) 등을 지원하며 국내 축구 발전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축구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애정은 고마운 일이지만 한 사람의 관심에 기초해서 팀이 운영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축구인들은 그동안 미뤄왔던 축구계 현안을 하나씩 풀어가며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프로축구 승강제 도입, 학교축구 정상화 등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K-리그가 아시아 최고의 리그로 거듭나고, 한국 유소년 시스템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이 된다면 FIFA 부회장에서 누가 떨어졌다고 해도 지금처럼 호들갑 떨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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