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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취하지 말고 국가브랜드·내수 키우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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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호 03면

기원 이래 세계경제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미약했다(서기 1~1500년). 산업혁명기를 거쳐 20세기 중반까진 더욱 위축됐다(1900~1960년).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의 비중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1990~2015년). ※자료:영국 셰필드 대학

일확천금(一攫千金)으로 횡재하고 천냥 빚을 한마디 말로 갚았다. 백금(百金)을 주고 집을 사고 천금(千金)을 주곤 이웃을 샀다. 대장부의 한마디는 천금만큼 무거워야 했다. 불가에선 ‘일각천금(一刻千金)’이란 네 글자로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천금이나 천냥은 너무 많아 실감하기 어려운 엄청난 재산이나 가치 있는 것들의 상징이었다.

트리플 1000조원 시대의 한국경제

1000이란 숫자에 이런 의미가 담긴 것은 인간의 두뇌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00까지는 주변의 구체적인 사물과 연결 지을 수 있지만 1000 이상이 되면 그게 어려워져 일종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구구단의 가장 높은 수가 81이고, 인간의 생로병사는 108번뇌로 요약된다. 초등학생들이 직접 써보는 숫자도 1에서 100까지다. 그 이상은 천, 만, 억이라는 단위 개념으로 배운다. 이들 단위의 첫 자리인 1000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의 상징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하다.

2010년 한국 경제가 트리플 1000조원 시대에 들어섰다. 국부, 수출입, 자본시장을 각각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과 무역규모,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모두 네 자릿수다. 개별적으론 몰라도 셋이 나란히 1000조원 고지를 넘은 건 지난해가 처음이다. <그래픽 참조>

1000조원. 1000에 조라는 단위까지 붙었으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한 장에 1g인 1만원권으로 계산하면 10만t이다. 승무원과 비행기를 꽉 채운 미국의 최신예 항공모함과 맞먹는다. 보잉747기 250대, 250m 길이의 중형 유조선에 기름을 꽉 채운 무게와 같다. 1만원권으로 이어붙이면 1480만㎞가 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10분의 1이다. 달까지는 너끈히 19번을 다녀올 수 있다. 차곡차곡 쌓으면 11만㎞다. 에레베스트산 1200개보다 높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과정은 숨가빴다. 세계를 놀라게 한 압축성장의 진수였다. 6·25를 겪고 난 1953년 한국은 세계의 최빈국이었다. 한국은행이 2005년을 기준으로 산출한 GDP는 13억 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보다 아래였다. 나라 전체의 소득이 겨우 1조원대였던 셈이다. 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뒤 이 숫자는 해마다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75년 10조원, 11년 뒤인 86년 100조원을 넘어섰다. 여기에 0이 하나 더 붙은 건 22년이 흐른 2008년부터다. 200개에 가까운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상위 10%권에 올라섰다. 물가를 감안한 실질 GDP는 지난해 처음 100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53년 6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GNI)은 65년 100달러, 77년 1000달러, 95년 1만 달러를 각각 돌파했다. 경제위기를 겪으며 잠시 내줬던 2만 달러 고지도 지난해 다시 되찾았다.

국부를 키운 것은 단연 수출이었다. 지식경제부는 지난해 한국경제가 수출 4674억 달러, 수입 4257억 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 규모인 417억 달러 흑자를 냈다고 1일 밝혔다. 수출입액을 합한 무역규모도 사상 최대인 8931억 달러(1013조원)에 달했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품목의 선전에 힘입어 수출 세계 7위, 무역규모 세계 9위가 됐다.

통계를 내기 시작한 57년 한국의 수출액은 2200만 달러였다. 수입액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64년 1억 달러를 넘긴 수출은 71년 10억 달러, 77년 1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거침없이 내달렸다. 70~80년대를 주도한 중화학공업에 이어 주력수출품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보기술(IT) 산업은 95년 1000억 달러에서 지난해 4500억 달러로 수출 규모를 키운 일등공신이 됐다. 수입을 포함한 전체 무역규모는 67년과 72년 각각 10억 달러와 100억 달러를 넘어섰고, 88년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준규 기획재정부 장관 대외경제자문관은 “2008년 원화로 환산한 무역규모가 1000조원을 넘어선 적이 있지만 금융위기와 원자재값 급등, 원화가치 급락에 따른 비정상적 결과였다”며 “한국 경제의 ‘평소 실력’으로 1000조원을 달성한 건 지난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자본시장의 맷집을 대변하는 증시 시가총액도 지난해 1000조원을 돌파했다.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주식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연말 1237조원으로 불어났다. 93년(11조2000억원) 이후 17년 만에 10배 이상으로 몸집을 불렸다. 내용도 좋아졌다. 코스피 지수가 처음 네 자릿수를 기록한 1989년 시가총액은 100조원을 갓 넘는 수준이었다. 이후 시가총액이 10배로 불어나는 동안 지수는 2배가량이 됐을 뿐이다. 장사를 잘하는 기업들의 신규 상장과 기존 상장사의 고속성장이 함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2011년 전망도 나쁘지 않다.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정부 측은 GDP 성장률을 5%대로 본다. 증권사를 비롯한 민간에선 4%대를 내다보지만 잠재성장률에 견줘 크게 뒤지지 않는다.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28%에서 올 10%안팎으로 하락할 전망이다. 하지만 지난해 증가율은 2009년 14% 감소한 뒤 정상궤도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다. 세계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두 자릿수 증가율은 괜찮은 숫자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 경우 사상 처음으로 올해 무역규모 1조 달러, 교역규모 세계 8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증시 시가총액 역시 1000조원 시대를 굳건히 지킬 전망이다. 시가총액이 GDP보다 많아진 게 과열신호라는 해석도 있지만 수출에 강한 한국기업의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교역의존도가 높은 홍콩은 이 비율이 1100%, 대만은 200%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GDP는 세계 10위권 중반, 시가총액은 20위권인 점을 보면 아직은 더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2011년이 마냥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수출에만 의존한 성장이 지속될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15년 전, 증시의 시가총액 상위 20개 기업이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가 안 됐다. 이 비중은 현재 절반 이상으로 불어났다. 수출의 역할이 커지는 만큼 외풍에 시달릴 가능성도 커졌다는 얘기다. 이 센터장은 “잘 굴러가는 수출을 북돋워 파이를 키우면서 내수의 몫을 늘려가는 게 중장기적으로 가장 큰 과제”라고 했다.

양적 확대보다 부가가치를 높이는 수출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영대 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명실공히 무역대국이 되면서 교역 상대국의 압력이 커지고 가격경쟁력에 기반한 밀어내기식 수출이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며 문화와 가치를 담은 새로운 주력상품을 발굴해야 한다고 했다. 기업경쟁력보다 약한 국가브랜드를 높이는 일도 시급하다. 한 대기업의 수출담당자는 “중국을 통한 우회수출이 급증하면서 자동차·가전 등 일부 제품을 제외하면 세계 소비자가 ‘메이드 인 코리아’를 볼 수 있는 상품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상태”라며 “취약한 국가브랜드가 수출기업의 브랜드와 부가가치를 깎아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정부와 사회부문의 경쟁력 향상을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개인 역량(11위)에 비해 기업(15위)·정부(19위)·사회(20위)의 경쟁력이 낮아 질적인 국가경쟁력(19위)과 삶의 질(26위)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여당의원조차 1000조원을 넘겼다며 걱정하는 나랏빚과 올해 1000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 가계부채 관리도 미룰 수 없는 숙제다.

덩치가 커진 만큼 정부정책이 더 신중하고 정교해져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일본이 90년대 초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기 전의 성장률을 지속했다면 이미 미국을 넘어섰을 것이다. 임기영 외국어대 교수(국제경제)는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작은 실수가 큰 결과를 낳게 마련”이라며 “정부가 1년이 아니라 10년을 내다보는 정책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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