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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에 ‘옌지’ 있다면 고려인에겐 ‘시온고 마을’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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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호 08면

김 스웨타씨 일가 3대(代) 44명. 2008년 12월 27일 타슈켄트에서 김씨의 어머니인 최 리자(둘째 줄 오른쪽에서 셋째) 할머니의 칠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다. 김 스웨타(둘째 줄 왼쪽에서 넷째)씨 친척들의 경우 우즈베키스탄·러시아·한국·카자흐스탄·독일·리투아니아 등 6개국에 흩어져 산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 번째 디아스포라다. [김 스웨타 제공]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동남쪽으로 30여㎞ 떨어진 시온고 마을.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과 밀밭 사이에 섬처럼 자리 잡은 자그마한 부락이다. 이 마을에는 우즈벡에서 보기 힘든 소나무길이 중앙로에 아름답게 조성돼 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소나무와 함께 한국인 외모의 행인들이 ‘카레이스키(고려인) 집단 거주지’임을 일깨워준다. 행정 지명은 ‘아흐마드 야사위’. 약 210ha 땅에 800가구, 400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디아스포라 마을’에서 띄우는 희망 편지

신묘년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시온고에서 20년째 양파 농사를 하는 고려인 2세 김 다미르(49)씨는 150㎡ 넓이의 비닐하우스 온실에서 반쯤 자란 상추와 당근·파·마늘·향채를 보면서 꿈에 부풀어 있다. 김씨는 그동안 1.5ha 농지에서 연간 90t의 양파를 수확해 4000~5000달러의 수입을 올려왔다. 일가족 4명의 생계비와 큰아들의 대학 학비를 대기엔 빠듯한 금액이다. 그래서 비닐하우스 농사에 눈을 떠 겨울철엔 고수익 작물을 키우는 데 매달린다.

우즈벡에서도 농사일은 힘들고 소득도 낮은 편이다. 그래서 이 마을 고려인 420가구 가운데 10가구밖에 농사를 짓지 않는다. 한국 농촌진흥청 우즈베키스탄센터(소장 김재영)는 지난해 11월 고려인 6가구에 무료로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줬다. 이때 모범 농사꾼 김씨도 손을 들었다. 시온고에선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김씨는 옛 소련 시절 촉망 받는 젊은 농사꾼이었다. 시온고 출신인 그는 카자흐스탄 농대에서 5년간 공부한 뒤 1990년부터 양파 농사를 시작했다. 한 해 농사로 집과 자동차를 살 만큼 돈을 벌었다. 그 무렵 옆집 처녀 안젤라와 결혼해 아들 둘(16, 17세)을 낳아 키웠다.

시온고 마을의 어원도 흥미롭다. 현지에선 ‘신영동’이라는 말이 오랜 세월이 흘러 음가가 변한 것으로 본다. 연해주에 있었던 ‘신영동’이라는 콜호즈 출신 고려인들을 지칭한다는 설과,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으로 잘 알려진 ‘신영동’이란 지역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설이 있다.

1일 오전 9시, 시온고 마을에 자리 잡은 아리랑요양원. 허 알렉산드르(75) 할머니는 요양원 2층 물리치료실에서 간호사 ‘굴야시’의 도움을 받아 자동안마기로 통증이 심한 어깨를 치료하고 있다. 물리치료를 받은 다음 “10분만 이용하면 피로가 싹 가셔서 자식들보다 더 나은 효자”라고 말했다.

허 할머니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조카 아파트에서 얹혀 살다 요양원에 들어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벽을 더듬거리면서도 오전 9시면 어김없이 한국식 온돌이 깔린 물리치료실(넓이 126㎡)에 나타난다. 물리치료실은 요양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안마의자, 러닝머신, 헬스 사이클, 찜질팩 등 다양한 설비가 갖춰져 늘 북적댄다. 우즈벡에선 부자들이나 갖출 사치품이다. 굴야시는 “무릎·허리·어깨 통증이 심하신 20여 명이 주로 이용한다”고 말했다. 안마의자는 순서를 기다릴 만큼 줄이 길다.

한국 정부, 노인요양원 세워 41명 보살펴
아리랑요양원은 옛 소련 지역에 산재한 50만 명의 고려인 가운데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한 우즈벡 거주 ‘1세대 독거노인’을 위해 우리 정부가 세운 곳이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총재 한광수)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연 2억5000만원을 지원받아 지난해 1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우즈벡 전역에서 모여든 41명의 불우한 어르신들은 한국에서 파견된 원장과 사회복지사 이외 의사·간호사·요양보호사 등 현지 직원 20명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평균 나이는 79세.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현지 식생활 탓에 고혈압·심장병 환자가 많다.

허 할머니는 “고려말을 하는 고려사람끼리 고려음식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설·추석 등 우리 명절을 함께 쇠니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저녁 한국식 떡국을 먹고선 “너무 맛있다”며 추가로 반 그릇을 비우는 노인들도 적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보이지 않는 민족 차별을 겪어온 탓인지 한국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김명관(80) 할아버지는 “유진 카레아(남한)에서 이런 시설들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인 사업가, 유황온천 개발로 활기
시온고 마을의 변화 바람은 그뿐 아니다. 한국의 국제민간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은 보건소 건립·운영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박강윤 한·중앙아시아교류진흥회장이 98년 감초공장을 설립한 뒤 한국인의 발길도 잇따르고 있다. 소나무길 중앙로에는 박 회장의 지원으로 학생공부방과 노인쉼터를 갖춘 ‘시온고 노인회관’이 2002년 문을 열었다. 낮엔 30여 명의 노인들이 카드·체스놀이를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경기도새마을회는 지난해 마을 초입에 있는 고려인공동묘지 건물을 새로 단장했다. 대학생·봉사단체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시온고의 명물로 손꼽히는 곳은 1만2000평 규모의 유황온천 ‘메르시안’ 휴양시설이다. 65년께 고려인들이 지하 2500m 암반에서 광천수를 개발한, 우즈벡에선 유일한 유황온천이다. 2003년 한국인 사업가가 낡은 국립 휴양소 병원을 인수한 뒤 현대식으로 개·보수했다. 현지인들이 보통 열흘가량 머물며 요양과 온천사우나를 즐기고, 한국인 교민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마을 끝자락에는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돼지농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인근에선 가장 큰 돼지농장인데, 한국의 선진 축산기술로 자란 덕에 육질이 좋아 불티나게 팔린다. 이슬람 국가인 우즈벡에선 돼지고기를 금기시하지만, 고려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민족들의 소비가 크게 늘고 있다. 아직 사육농장이 적어 고기 값도 지난해보다 50%쯤 치솟았다.

돼지농장을 운영하는 경석대씨는 “고려인 어르신들의 협조를 받아 5년 전에 들어왔는데 고려인 3명과 러시아인 일꾼 3명이 일한다”고 말한다. 경씨는 사육하는 돼지 수를 312두에서 올해엔 500두로 늘릴 계획이다.

가족 잔치 많고 아낌없이 돈 써
시온고는 고려인들의 거듭된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곳이다. 얀 알렉산드르(75) 고려인 노인회장은 “우리 마을은 옛날 소련 전역에서도 잘사는 고려인 대표 콜호즈(집단농장)였다”며 “그러나 우즈벡 독립 이후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서 절반 넘는 고려인이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가족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인터내셔널 패밀리’가 대부분이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한 맺힌 유랑을 겪다가 옛 소련 해체 후엔 러시아 등지로 다시 ‘제2의 유랑’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때 23만 명이던 우즈벡 고려인은 15만 명으로 급감했다.

시온고 마을에 가끔 오는 김 스웨타(46·사진)씨. 타슈켄트 중심가에서 치킨식당을 운영한다. 그녀의 자식과 형제, 사촌들은 직장·결혼 등의 이유로 러시아·한국·카자흐스탄·독일·리투아니아 등 6개국에 흩어져 산다. 김씨의 외아들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돼지농장에서 일하고 있고, 큰딸은 모스크바의 이벤트업체 프로듀서다. 작은 오빠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옷장사를 하고, 큰언니는 독일인과 결혼해 독일에 살고 있다. 이종사촌 동생은 리투아니아인과 결혼해 5년 전 이주했고, 이종사촌 시누이는 한국인과 결혼했다. 친가 쪽 고모와 삼촌 5명은 93년 강제 이주 이전의 고향인 극동 연해주로 돌아갔다. “우즈벡도 러시아도 고향이 아닙니다, 과연 고려인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입니까?” 김씨는 애잔한 눈빛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곤 한다.

그래선지 고려인들은 가족·친지들이 같이 모이는 잔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결혼·환갑·칠순은 물론 생일·돌도 크게 치른다. 남녀노소 파티복을 입고 춤추고 놀면서 현실을 만끽한다. 품앗이 형식으로 연중 내내 잔치다. 스웨타는 “얼마 전 손녀 돌잔치에 1년간 번 돈을 썼지만 먼 데 살던 가족들을 다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우즈벡서 지난해 6536명 한국행 취업비자
시온고 마을에선 요즘 한국행 바람이 거세다. 러시아에서의 돈벌이가 예전만 못한 데다 지난해 고려인 방문취업비자 쿼터가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국대사관 측은 지난해 쿼터(1490명)의 4배가 넘는 신청자 6536명에게 모두 비자를 내주는 특별 조치를 취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조국이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고려인들이 많아졌다.

시온고 마을은 이제 중국 조선족의 옌지(延吉)처럼 우즈벡 고려인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타슈켄트의 신코리아타운 시온고 고려인 마을과 한국문화’라는 논문을 발표한 임영상 한국외대 교수는 “시온고는 고려인 밀집지역인 데다 아리랑요양원이 들어서고, 한국 사회의 지원이 늘면서 중앙아시아의 ‘신코리아 타운’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고려인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이 지역 학교의 황 나제즈다(42) 교사는 “우리 마을은 인근 김병화 농장, 프라우다 농장, 폴리타젤 농장 등과 함께 고려인이 쓸모없는 뻘밭을 옥토로 바꾼 성공 사례 중 하나”라며 “고려인의 통한과 기적과 감동이 서려있는 자랑스러운 고려인의 발흥지”라고 말했다. 고려문화협회(회장 신 블라드미르)는 강제이주 후 사용하던 오래된 생활물품, 사진·메달 등 기록물과 기념품, 콜호즈 역대 회장 유품 등을 모아 아리랑요양원 안에 ‘고려인 생활박물관’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시온고 마을은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딛고 고려사람과 한국사람이 ‘한민족’ 동포로서 만나는 희망의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헌태 원장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88년 대구 매일신문에 입사해 주로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2002년 보보스링크 대표이사를 거쳐 2005년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2009년 2월부터 우즈벡에서 근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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