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딸이 납치됐다" 알고도 당하는 보이스피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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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에 사는 조모(47·여)씨는 20일 오전 11시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거기 주모(20)양 집이죠? 잠깐만 기다려보세요."라고 하더니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바꿨다.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딸은 "지금 어떤 남자한테 잡혀있는데, 이 남자가 옷을 벗기고 사정없이 때린다.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 미쳐 딸과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다시 전화를 낚아챈 남자는 "죄 짓고 출소한 지 3개월 됐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니 이 계좌번호로 보내라."라고 말했다.

당황한 조씨는 "뭐든 다 들어줄 테니 우리 딸을 풀어달라며 울었다. 그 때 옆방에서 책을 읽던 딸이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쳐나왔다. 그제야 비로소 조씨는 자신이 속은 것임을 깨달았다.

조씨는 "딸의 목소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여서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말로 딸이 잡혀간 줄 알았다. 돈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또 "나는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조씨는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싶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요즘 이런 보이스피싱 신고 전화가 많이 오고 있으니 조심하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최근 세금환급, 은행업무, 우편물 도착 등과 같은 전형적인 보이스피싱을 넘어서 당사자의 불안 혹은 기대 심리를 악용한 수법들이 사회 전반에 극성을 부리고 있다. 부부관계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해 개인정보를 취득하거나 가정불화를 조장하는가 하면 해외은행을 사칭한 해외 펀드 투자를 유도, 혹은 경품 당첨 등을 미끼로 보이스피싱을 실행하고 있다.

특히 자녀납치 협박의 경우는 이전보다 위협의 강도가 훨씬 높아져 '자녀를 납치해 성인 비디오를 찍었으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영상을 유출하겠다.' 등 구체적인 범죄 계획까지 발설하는 사례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친언니가 얼마 전 낯선 사람으로부터 아들이 납치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이름까지 대며 아이 울음소리를 들려주는데 가슴이 덜컥했다고 하더라."라고 말하며 "경찰에 신고하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해서 꼼짝없이 돈을 송금해야만 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뒤이어 "잠시 후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당한 것을 알게 된 언니는 곧바로 은행과 경찰에 신고했다."라며 "다행히 돈은 절반 정도가 출금된 상황에서 막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이 더욱 지능화되어 '생계침해형' 범죄가 활개를 치고 있다"며 "갑작스럽게 가족이나 지인의 사고나 납치 등을 이유로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는다면 일단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또한, "보이스피싱에 속아 돈을 송금한 뒤라도 거래은행 콜센터에 신속히 연락해 지급정지를 요청해 현금 인출을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유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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