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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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2

프로그래머는 한사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여자애는 최근에 생긴 산업정보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관음봉에서 세지봉으로 이어지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비인가 고등학교였다. 프로그래머는 학교로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관련 업무를 청부 맡고 있어 가끔 그 학교를 드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일을 보고 나오다가 차를 태워달라고 손을 든 여학생을 ‘선의로’ 태웠다고 했다. 그 학교는 경사가 급하고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걔가 먼저 밥을 사달랬어요…….”
프로그래머는 일관되게 진술했다.
동네로 내려와 ‘안쓰러워’ 근처의 중국집에서 밥을 사주었는데 구태여 ‘고량주’를 먹겠다고 해서 고량주를 시켜준 것이 사달의 시작이었다. 취한 다음부터는 여학생 스스로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었다고 했다. 데려다줄 테니 집주소를 대라고 해도 대답하지 않았고,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설득해도 한사코 울기만 했다는 게 프로그래머의 진술이었다. 취해서 몸을 가누기 힘든 여학생을 거리에 그냥 버려두어야 옳은 거냐고, 프로그래머는 오히려 경찰에게 반문했다.

“방에 데려와서도, 난 그저 자라고 했을 뿐이에요.”
달래서 침대에 뉘어놔도 여자애는 잠들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방에 들어온 뒤 여자애가 한 말은 ‘돈이 필요해요’가 전부였다. 스스로 매춘의사를 밝힌 셈이었다. 뒤란에 떨어진 여자애는 교복 바지와 상의가 벗겨진 채였다. 여자애 스스로 바지와 상의를 벗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그 진술에서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눈을 부라렸다.

“무슨 짓이야!”
그는 배우처럼, 사실적인 제스처를 쓰며 소리쳤다.
“정말이에요. 무슨 짓이야! 빨리 옷 입지 못해! 걔가 옷을 벗을 때 제가 그렇게 소리 쳤다구요. 그뿐이었어요. 여자애가 비질비질 울기 시작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렸어요. 믿기지 않으면 여자애한테 물어보세요. 대질 신문을 해도 좋아요.”
대질신문은 할 수 없었다.

여자애는 허리가 손상돼 앉을 수도 없었고, 또 어디가 어떻게 된 것인지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연락을 받고 파출소로 달려온 여자애의 어머니는 울기만 했다. 아버지는 없고 중학교 다니는 남동생과 어머니가 가족의 전부라고 했다. 파출부를 하고 있다는 여자애의 어머니는 혀가 짧은 데다가 심하게 말을 더듬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검사결과 성적 관계가 없었다는 건 사실로 판명됐다. 여자애가 진술을 할 수 없으니 당연히 ‘강간미수’를 증명할 방도가 전무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구류 사흘 만에 풀려났다.
“이사장님이 손썼으니 그만한 게야.”
“압니다. 은혜, 꼭 갚겠습니다.”
백주사가 말했고 그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검투사 이사장이 경찰에 손을 써 그를 빨리 풀려나오도록 했다는 걸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는 이사장과 프로그래머의 관계는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사장은 그의 신분보증을 서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 고위층에게까지 선처를 부탁한 모양이었다. 정황은 내가 보기에 명백한 강간미수였다. 207호실 젊은 순경도 그런 심증을 갖고 있는 눈치였다. 전에도 여러 번 프로그래머가 어린 여자애들을 데려왔다는 사실을 나는 상기했다. 사전에 백주사의 당부가 있어 그것을 경찰에게 진술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강간미수, 증거도 없잖아.”
백주사는 내게 은밀하게 당부했다.
“그러니 자네는 이 일에 끼어들 거 없네.”
도덕적 위로금 이백만 원이 여자애의 어머니에게 건네졌다.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여자애는 평생을 누워 살거나 좀 좋아진다고 해도 휠체어 신세를 면하지 못할 터였다. 프로그래머는 자신의 ‘선의’를 강조하며 ‘선의만은 오히려 표창을 받아야 할 일’이라고 끝끝내 강변했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물론이고, 백주사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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